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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경백."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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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이 끝났다. 호송차에 오르기 위해 재판소에서 나올 때, 나는 매우 짧은 한순간 여름날 저녁의 냄새와 색깔을 다시 느꼈다. 호송차의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한 도시의 온갖 친숙한 소리들,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던 어떤 시각의 온갖 친숙한 소리들을 마치 내 피로의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양 하나씩 다시 떠올렸다. 이미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대기를 가르는 신문팔이들의 외침소리, 작은 공원의 마지막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들의 호객소리, 시내 급커브길을 도는 전차의 마찰음, 항구에 어둠이 내리기 전에 하늘에 깃드는 아련한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행로, 내가 눈감고도 걸을 수 있었던 행로를 내게 다시 그려주었다. 그렇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던 시각이었다.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언제나 가벼운 잠, 꿈도 없이 가벼운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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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이야기를 듣는데 열중했음에도 가꿈 나도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는데, 그때마다 내 변호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잠자코 있어요, 그게 더 낫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를 제외한 채 사건이 다뤄지고 있는 셈이었다. 모든 것이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내 의견의 청취 없이,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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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를 귀울였고, 나를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한 평범한 인간의 장점이 한 죄인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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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모든 장광설들, 내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 그 모든 날들, 그 끝없는 시간들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이 무색의 물, 내가 그 속에서 현기증을 느꼈던 무색의 물처럼 되어버리는 인상을 받았다.

 

결국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내 변호사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아이스크림 장수의 나팔소리가 거리로부터 여러 방과 여러 법정을 거쳐 내 귀에까지 울려 퍼졌다는 사실뿐이다.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삶,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더없이 소박하고 더없이 끈질긴 기쁨을 발견했던 삶에 대한 추억에 사로잡혔다. 이를테면 여름 냄새, 내가 좋아했던 동네, 저녁 하늘, 마리의 웃음과 원피스가 내게 준 기쁨에 대한 추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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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에게 그만 가달라고, 나를 혼자 있게 해달라고 말하려 했을 때, 그가 갑자기 나를 향해 돌아서며 폭발하듯 소리쳤다. "아니, 나는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도 다른 하나의 삶을 소망한 적이 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나는 물론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은 부자가 되거나, 헤엄을 아주 잘 치거나, 더 잘생긴 입을 가지기를 소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게 없다고 대답했다. 둘은 동일한 차원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끊었고, 내가 그 다른 하나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자 나는 "내가 현재의 이 삶을 추억할 수 있는 하나의 삶"이라고 소리쳤고, 연이어 이제 그런 이야기에 진력이 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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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그가 떠난 후,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했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로 별들이 가득 보였기 때문이다. 전원의 소리가 내 귓전까지 올라왔다. 밤의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적셨다. 이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마치 밀물처럼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그때, 밤의 어둠 저 끝에서 뱃고동이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이제 나는 왜 엄마가 삶이 끝날 무렵에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엄마가 삶을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거기, 거기에서도, 뭇 생명이 꺼져가는 양로원 주위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욕망이 일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로 인해 눈물을 흘릴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내게서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비워준 듯, 신호와 별들이 가득한 밤의 어둠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가슴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그토록 형제 같으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결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일은 처형일 날 모쪼록 많은 구경꾼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를 소망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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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중에서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는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의 빈민가로 이사했고, 가정부 일을 하며 두 아들 뤼시엥과 알베르를 키웠다.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웠고 글을 읽을 줄 몰랐기에 늘 침묵 속에서 살았다. 유명 작가인 아들의 글을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던 것은 어머니에게 크나큰 슬픔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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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는 것, 그것은 최고로 고독한 삶이다.

 

작가는 고독 속에서 작품을 완성하며 그리고 정말 훌륭한 작가라면 날마다 영원성이나 영원성의 부재와 맞서 싸워야만 한다.”

 

- 1954년, 노벨문학상 당선 소감,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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