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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

 

"그래, 돈 마련은 그럭저럭 끝냈단 말이지?"하고 까마귀라고 불리는 소년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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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잘 들어. 엄청나게 지독한 모래 폭풍을 상상해 봐"하고 그가 말한다. "다른 모든 일은 모두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야."

그가 시키는 대로, 엄청나게 지독한 모래 폭풍을 상상한다. 다른 일은 모두 완전히 잊어버린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내 속은 텅 빈 것 같다. 모래 폭풍이 곧 머리에 떠오른다. 늘 그랬듯이 나와 까마귀 소년은 아버지 서재의 낡은 가죽 소파 위에서 그 모래 폭풍을 함께 상상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운명이란 끊임없이 진행하는, 방향을 바꿔가며 어느 특정한 지점에 집중되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하고 까마귀 소년은 나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시 또 모래 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조차 없어.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런 모래폭풍을 상상하란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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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지금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되어야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터프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네 스스로 이해해야만 하는 거다,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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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물론 너는 실제로 그놈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될 거야. 그 맹렬한 모래 폭풍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이고 상징적인 모래 폭풍을 뚫고 나가야 하는 거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놈은 천 개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네 생살을 찢게 될 거야. 몇몇 사람들이 그래서 피를 흘리고, 너 자신도 별수 없이 피를 흘리게 될 거야. 뜨겁고 새빨간 피를 너는 두손으로 받게 될 거야. 그것은 네 피이고 다른 사람들의 피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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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나는 이따금 잠에서 깨어 싸구려 커튼 사이로 밤의 고속도로 풍경을 바라본다. 빗방울이 소리를 내면서 세차게 차창을 두드리고,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 불빛을 흐려놓고 있다. 가로등은 같은 간격을 유지하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다음 순간에는 이미 낡은 빛이 되어 등 뒤로 사라진다. 문득 시계를 보니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마치 앞으로 떠밀린 것처럼 나의 열다섯 번째 생일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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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어. 하지만 하나만은 말할 수 있지. 요컨대 어떤 종류의 불완전함을 지닌 작품은 불환전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적어도 어떤 종류의 인간의 마음을 강렬하게 끌어당긴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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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운전하면서 자주 슈베르트를 듣는 것은 그 때문이야.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게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든 불완전한 연주이기 때문이지. 질이 높은 치밀한 불완저함은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고 주의력을 일깨워주거든. 이것 이상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완벽한 음악과 완벽한 연주를 들으면서 운전을 하다간, 눈을 감고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D장조 소나타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한계를 듣게되지. 어떤 종류의 완전함이란 불완전함의 한없는 축적이 아니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거야. 그것이 나를 격려해 주거든. 내가 뭘 말하는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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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베르트의 소나타에 귀를 기울인다.

"어때, 지루한 곡이지?"하고 그가 말한다.

"네, 확실히"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한다.

"슈베르트는 훈련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지. 나 역시 처음에 들었을 때는 지루했어. 네 나이라면 그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인간은 이 세상에서 다분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에는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되고,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대개 지루한 것이라는 걸. 그런 거야. 내 인생에는 지루해할 여유는 있어도 싫증을 느낄 여유는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두가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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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그 말은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히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오시마 상이 이 의자에 앉아서 뾰족한 연필을 손에 들고 책 표지 안쪽에 메모를 쓰고 있는 광경을 상상한다. 꿈속에서 책임은 시작된다. 그 말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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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찬란한 밤하늘 아래서, 다시 격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숨이 답답해지고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이처럼 엄청난 수의 별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나는 살아왔는데도, 그들의 존재를 지금가지 인식하지 못했다. 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별뿐만이 아니다. 그 밖에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나 모르는 것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나 자신이 구제할 길 없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가도 가도 끝없이 그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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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남들처럼 인사부터 하지. 하지만 인사가 끝나면 즉시 이별이 시작되네. 헬로, 굿바이― 활짝 핀 꽃에 불어 닥친 폭풍이라는 비유도 있잖은가. 작별만이 인생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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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었어. 너는 무언가를 강렬하게 찾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피하려 하고 있다고. 네게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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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이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원할 때 그것은 대게 찾아오지 않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할 때, 그것은 저쪽에서 자연히 찾아오고 말이야. 물론 그것은 일반론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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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이야기에서 틀림없이 커다란 전환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네 말대로야."하고 오시마 상이 말했다. "그것이 이야기의 공통적인 구성 요소지. 커다란 전환. 의외의 전개. 행복은 한 종류밖에 없지만, 불행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야. 톨스토이가 지적한 대로 말이야. 당사자 이외의 타인에게 행복이란 교훈적인 우화이고, 불행이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일 경우가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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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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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예전에 이 방에서 살았던 소년일지도 모른다. 사에키 상이 사랑했던 동갑내기 소년. 스무 살 때 학생운동에 말려들어 의미 없이 살해당한 소년.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든다. 풍경도 이 부근 해변의 모습 같다. 만일 그렇다면, 이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은 사십 년쯤 전의 풍경일 것이다. 사십 년이라는 세월은 나에게는 거의 영원처럼 생각된다. 시험 삼아 사십 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그것은 우주의 끝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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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야. 그것을 네가 좀 이해해 주었으면 해. 나는 괴물이 아니야. 보통 인간이지.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행동하지. 그러나 그 사소한 차이가 때로는 끝없는 심연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그야 물론,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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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마 전부터 갑자기 나카타는 고양이 상하고 이야기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세계는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고, 나카타 상. 매일 때가 되면 날이 밝지. 그러나 거기 있는 건 어제와 똑같은 세계는 아니지. 여기 있는 건 어제의 나카타 상이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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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내 말 잘 들어, 다무라 카프카 군. 네가 지금 느끼는 것은 수만흔 그리스 비극의 동기가 되기도 한거야. 인간이 운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인간을 선택한다, 그것이 그리스 비극의 근본을 이루는 세계관이지. 그리고 그 비극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하고 있는 것이지만―아이러니컬하게도 당사자의 결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사자의 장점을 지렛대로 해서 그 비극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거야. 내가 말하는 걸 알 수 있겠어? 다시 말하면 인간은 각자가 지닌 결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질 즉, 타고난 장점이나 아름다운 성질에 의해서 더욱 커다란 비극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거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그 뚜렷한 본보기라고 볼 수 있어.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 게으름이나 우둔함 때문이 아니라 그 용감성과 정직함 때문에 그의 비극은 초래되었거든. 거기에 불가피하게 아이러니가 생겨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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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을 켜고 침대에 일어나 앉은 채 아침을 맞는다. 책을 읽을 수도, 음악을 들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다만 거기 일어나 앉아서 아침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늘이 희끄무레해지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잠자는 동안에 나는 운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베개는 차갑게 젖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에 흘린 눈물인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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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징의 대상은 아마도 언젠가의 시간이며, 어딘가의 장소이다. 그리고 또 일종의 마음의 존재 방식이다. 그녀는 그와 같은 행복한 우연의 만남에서 빚어진 요정처럼 보인다. 영원히 상처 입을 리 없는 청순하고 순진무구한 상념이 그녀 주위에 다사로운 봄빛의 포자처럼 떠돌고 있다. 사진 속에서 시간은 딱 정지되어 있다. 1969년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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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프카라는 이름―사에키 상은 그 그림 속의 소년이 자아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고독을, 카프카의 소설 세계와 결부해서 파악한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렇게 때문에 그녀는 소년을 '해변의 카프카'라고 불렀다. 부조리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을 방황하고 있는 외톨이인 영혼. 아마 그것이 카프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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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중에서

 

프랑스 현대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우리의 삶이란 끄덕끄덕 졸다가 깜빡 깨어나고 다시 끄덕끄덕 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은 현실이 견딜 수 없어 늘 꿈을 꾼다. 저것만 얻으면 더 이상 소망이 없겠지. 그러나 막상 그것을 얻는 순간 그는 퍼뜩 깨어난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이 스르르 미끄러지는 것을 발견한다. 텅 빈 손을 참을 수 없어 그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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