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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켜지 않고 밤의 어둠 속에서 소녀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앉는다. 책상 위에 두 손을 얹고, 그녀가 방 안에 남기고 간 아련한 여운 속에 내 몸을 적신다. 눈을 감고 거기에 있는 소녀의 마음속 떨림을 퍼 올려 내 마음에 스며들게 한다. 나는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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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갑 속에서 나와 누나가 해변에서 놀고 있는 사진을 꺼낸다. 오시마 상은 그 사진을 한동안 보고 나서 미소 지으며, 나에게 돌려준다.

"해변의 카프카"라고 오시마 상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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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이 다시 메마른 소리를 낸다. 누군가가 망치로 내 마음의 벽에 긴 못을 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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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시마 상. 혼자 있을 때 상대를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이 된 적이 있어요?"

"물론"하고 그는 말한다. "이따금 있지. 특히 달이 창백하게 보이는 계절에는. 특히 새들이 남쪽으로 건너가는 계절에는. 특히 ……."

"어째서 물론이죠?"하고 나는 묻는다.

"누구나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 되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잃어버린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기분은 네가 발명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특허 신청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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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무라 군은 강해지고 싶은가 보지?"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특히 제 경우에는."

"다무라 군은 외톨이니까."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힘으로 살아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 합니다. 무리에서 외따로 떨어진 까마귀나 같죠. 그래서 저는 카프카라는 이름을 저에게 붙였습니다. 카프카란 체코 말로 까마귀라는 뜻입니다."

"흐응"하고 그녀는 조금 감탄한 듯이 말한다. "그래서 다무라군은 까마귀구나?"

"그렇습니다"하고 나는 말한다.

그렇습니다,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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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는 텅 빈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지금도 조금씩 부풀어 올라, 그것이 내 속에 남아 있는 알맹이를 자꾸만 먹어치운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나라는 존재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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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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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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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네가 숲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일부가 되고, 네가 빗속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쏟아지는 비의 일부가 되지. 네가 아침 속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아침의 일부가 되고, 네가 내 앞에 있을 때 너는 내 일부가 돼. 간단히 말하면 그런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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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야"하고 사에키 상이 말한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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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넌 거기에 있었거든. 그리고 나는 그 옆에서 너를 보고 있었고. 아주 오래전에 그 해변에서. 바람이 불고, 새하얀 구름이 떠 있고, 계절은 언제나 여름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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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틀에 손을 올려놓고 그녀가 사라진 부근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무언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에키 상은 돌아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만 부재라는 형태가 웅덩이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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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탁으로 돌아가서 의자에 앉는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컵에는 아직 허브 차가 조금 남아 있다. 나는 컵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둔다. 그 컵은 머지않아 잃어버릴 기억의 은유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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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설명해도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 건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제일 좋지.





- 끝문장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어."하고 나는 말한다.

"그림을 보면 알게 돼"라고 까마귀 소년은 말한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에겐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넌 이제 잠을 자는 것이 좋겠어"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 거야."

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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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달동안 엄청나게 긴 호흡으로 읽었던 책

공허가 내 알맹이를 먹어치운다는 구절이 어찌나 와닿던지.

어린이도 학생도 근로자도 부모도 스승도 나는 누구란 말인가(와 비슷한 내용의 오은시인의 시가 요즘들어 부쩍 떠오른다.)


이 책은 꿈같은 이야기와 현실적인 자아성장록을 넘나든다. 고독으로 둘러싸인 카프카는 결국 고달파도 현실에 돌아갈 것을 다짐한다. 숲에서 빠져나오던 카프카가 뒤를 돌아보고, 판타지적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누구든 속마음 깊숙한 곳에 간신히 숨겨놓고 있는 도피욕망..... 아무튼 이부분은 오르페우스 신화구조를 차용한 것이겠고, 이야기의 큰 틀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기반한다.



릴리슈슈의 모든것 ost 첫번째 트랙인 sight를 켜놓고 읽었다. "해변의 카프카"테마라고 얘기해도 믿을만큼 엄청 잘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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