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평균 연령 20세가량의 빌라 골목이다. 엊그제 막 신축이 끝나 건축 자재와 도배장판 냄새가 나며 카드키를 댈 때마다 LED 센서가 발광하는 빌라 옆으로, 마당에는 감나무가 서 있고 장마철이면 때때로 물이 차는 반지하방마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세 들어 사는, 40년 가까운 2층 주택이 나란히 자리한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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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순간 명정은 로봇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것은 아내가 살아 있었을 적, 그녀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기 전 만약 둘째 아이가 태어난다면 제 형과 돌림자로 지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영원히 부를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던, 그러나 상상 속에서 수도 없이 불렀기에 낯설지 않은 존재의 이름이 구체적인 발음과 형태를 띠고 혀끝에서 흘러내리는 순간, 그는 이 유용한 도우미를 가족 비슷하게 맞아들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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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지 않아 이런 장면에 익숙해지고 시들해지겠지만 당분간 즐길 거리 정도로는 충분하다.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주고받을 상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늘 같은 자리에 떨어져 심장에 구멍을 내던 물방울의 낙햐 방향을, 조금이나마 바꾸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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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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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질문을 삼키면 그것이 식도를 지나 위장에서 분해된 다음 몸 밖으로 영원히 배출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삭지 않는 밥알처럼 언제까지고 명치에서 맴도는 거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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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삶은, 아니 그냥 삶은, 어떤 것입니까."

한 쌍의 젓가락 끝이 달걀프라이의 중심을 찌르자 진한 노른자가 번져가는 얼룩처럼 흘러나온다.

"이거 만져봐."

"평소대로 반숙인데 뭔가 문제 있습니까."

"됐으니까 만져보라고."

은결이 달걀노른자를 건드리자, 실처럼 흘렀던 노른자가 본격적으로 깨지면서 손가락을 휘감는다. 그동안 내내 부쳐온 달걀의 촉감을 은결은 이제 처음으로 알았다.

"어때?"

"뜨겁습니다. 끈적거리고…… 비릿합니다."

"맞아, 그런거야."

은결은 고개 숙여 제 손을 들여다본다. 처음에는 삶이 달걀이라는 줄로 알아들었으나 곧 지시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촉각 센서가 그저 온도를 객관적으로 측정했을 뿐이며 인공피부에는 달리 손상이 없었지만 인간 어린이라면 빨갛게 짓무를 가벼운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쉽게 부서져버리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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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형태가 있는 건 더러워지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지우고 또 지웁니다. 어차피 다시 졸릴 테니 잠자리에 들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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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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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를 클릭하던 의사의 손길이 점점 늦어지고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은결은 알아차린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이 오랜 세월 쌓아온 체질이다. 투철한 직업정신이나 사회적 위신 같은 여과지로도 걸러내지 못하는 불수의근의 움직임 같은 것이, 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에 존재한다. 문화와 인종을 넘어 사뭇 보편적인 몇몇 동작들이 있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 보거나 착각한 게 아닌지 공연히 안경을 벗곤 한쪽 눈을 비빈다. 상대방에게 이 소식을 어디부터 전하면 가장 좋을지를 궁리하며 턱을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가벼운 한숨.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리듬. 꿈틀거리는 목울대. 은결은 그 모습을 천천히 관찰하고 갈무리한다. 그것을 흉내 내고 익힌다 한들 자신이 인간의 몸짓과 비슷해질 리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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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라, 네 안에는 물리학과 생물학뿐만 아니라 화학 천문학까지 들어 있지. 너는 지금까지 사람이 밝혀낸 한도 내에서 우주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을 거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 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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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불가능한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구전을 통해 허황되게 부풀려지는 것들. 존재의 진실성 여부가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수긍과 인정에 달려 있는 것들. 잊어버린 채 방기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노크해 오거나 부지불식간에 덜미를 잡아채는 것들. 실체를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과감히 렌즈를 들이대면 사라지는 것들. 그래서 때로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 것들.

그러므로 존재하기를 그만둘 게 아니라면, 차라리 이해하기를 멈춰야 옳은 것들. 은결은 그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로 그의 곁에 머물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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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건물이 아닌 사람이 무너진다는 의미를 분명히 학습한 적 있고 자신이 그렇게 될 일은 없으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 은결의 몸속에서 외부에 발산되지 않는 경보음을 비롯한 온갖 오류 메시지가 출력되고, 은결은 시호의 내민 손을 응대희 법칙에 따라 정중하게 쥐는가 싶더니 손끝이 닿는 순간 모로 무너져 내린다. 가장 먼저 후각이 꺼지고 촉각이 사라지며, 당황해서 이름을 부르는 시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야가 급격히 축소되는가 싶더니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외부 감시 및 감각 시스템이 강제 종료되며 은결의 눈꺼풀이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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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란 어떤 때입니까.

―지구상에 사람이 70억 명이나 되는데 그들 각자의 이유라면 70억 가지도 넘겠지만 너한텐 말해줄 수가 없구나. 말해본들 네가 알지 못할 좌절이기도 하고.

그때 은결의 머릿속에서 표적을 알지 못하는 방아쇠가 당겨진다. 다리의 신경을 지탱하던 인공세포들이 일순간 휘발되기라도 한 듯 은결은 욕조 깊이 주저앉는다. 옷이 빠르게 젖어든다. 욕조 등받이를 따라 엉덩이가 미끄러지고 거품이 입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인공장기가 외부의 이상 신호를 감지하고 팽창하는 감각. 주요 메모리 안으로 응축 및 집약되는 세계들. 어서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판단과, 이대로 머물렀을 때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와, 그 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예측 값 등이 한데 뒤엉킨다. 몸의 접합 부위마다 정교하게 장착된 인공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몸을 뚫고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 한다. 위험을 알리는 날카로운 버저가 머리를 울린다. 1분 뒤 터질 시한폭탄처럼 두근거리는 인공심장의 진동이 인공신경을 타고 달팽이관을 흔든다. 이어서 은결의 머리는 물속으로 완전히 잠긴다. 이대로라면 얼마쯤 지나선 방수장치가 내습 처리 용량의 한계를 넘어 심장에 물이 차오르는 감각이 전달되리라는 예측마저, 밀물처럼 눈앞에 쏟아지는 까만 어둠과 함께 중단된다.

―그 시간은 턱없이 짧은 탓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스며들지를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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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릭끼릭끼릭

치잉 윙

철컥

이어지는 완전한 암전이야말로 로봇이 꿀 수 있는 유일한 꿈이다.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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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훗날 자라 그 약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대도, 그는 괜찮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아이가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완전히 멈출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이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언캐니밸리가 불쾌한 골짜기랑 같은 말인줄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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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푼의 시간은 구병모 작가님의 글 중에서 가장 최신작인데 나는 출판된 지 반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야 읽어보았다;ㅅ; 작가님의 책을 많~이 읽어본건 아니지만 읽어본 책들이 다 좋았기에 이번에도 큰 기대를 걸고 읽었었음

- 주인공은 가족 중 홀로 남아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 그리고 어느날 죽은 아들의 이름으로 배송되어 온 로봇 '은결' 이다.

- 사실 내심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초반에는 소재에 살짝 실망을 했었다. 물론 우리의 생활에서 로봇은 아직 대중화 되지도 않았고,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고 많은 보수기간을 거칠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와 매체에서 로봇은 이미 식상한 클리셰 소재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지나치게) 자주 노출되었다. 작가의 말에서도 마르고 닳은 로봇의 감정발생 서사 라는 이야기가 나올정도니까...


- 명정이 왜 은결에게 정을 느끼게 되었는지가 사실은 잘 공감이 잘 안되었었다. 이름의 힘일까 라고 생각을 해봐도(언어의 힘은 강하니까!)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는데, 이야기의 중점이 명정이 아닌 은결이라고 생각해버리니까 한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쭉 훑어보니 오히려 그런 절제되고 최소화된 감정 묘사가 이 소설을 숱한 로봇 이야기들과 다르게 만들어주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 로봇의 눈으로 본 인간은 생각했던것보다 더 복잡했고 '관계'안에서 상호작용 하려면 무한의 알고리즘이 필요한 그런 성가신 존재였다. 


- 꽃씨 소재가 참 좋았고, 자살 소재도 정말 좋았는데 '다른 경우였다면 더 와닿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마음속에 인간 / 로봇 선이 너무 강하게 그어져 있어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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