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박민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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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벌판의 중심에는 탁구대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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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많이 맞았다. 특별히, 많이 맞는 날이 있다. 한달에 두세 번은, 꼭 그렇다. 어쩔 수 없다. 간단히 넘어가려 해도 이유가 내게 있는 게 아니니까. 끼익. 다시 쇳소리가 났다. 녹이 슨 소파의 스프링은, 그 자체로 천식을 앓는 노파의 기관지 같다. 기침이나 골골거리게, 나도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 확 늙어버리면, 따 같은 건 당할 일도 없겠지. 아니 마흔살만 되어도, 서른살, 아니 스무살만 되어도 좋아지겠지. 스무살. 스무,살. 스무살까지, 그런데 살아 있기나 할까? 제발, 살았으면 좋겠다. 높고, 원대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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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에어컨 좀 끕시다,라고 소리치는 것은, 그래서 날 좀 따돌리지 말라니까, 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모쪼록 그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반팔 아래의 삼두박근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 나는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다수의 결정이다. 참고, 따라야 한다. 에취. 뒤에서 누군가 심한 재채기를 했지만, 이내 버스 속은 잠잠해졌다.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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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편의점의 사장과는 친척이니? 뒤집힌 우산을 다시 뒤집으며 내가 물었다. 아니, 같은 클럽의 회원이야.

 

 

클럽이라니!

 

 

사실 무척이나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클럽, 게다가 그런 어엿한 성인과 친분을 나누는 클럽이라니. 순간 모아이가 명왕성 정도로 멀게 느껴졌지만, 나는 역시 내색하지 않았다. 어떤…클럽인데? 말해도 될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핼리혜성? 응. 그럼 뭐 소원 같은 걸 비는 건가? 그런 건 아니고, 쉽게 말하자면 핼리가 와서 지구와 충돌해주길 기다리는 사람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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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티가 검출된 에스키모와 펭귄 이야기 아니? 디디티? 뭐, 아황산가스와 비슷한 거라 여기면 돼. 그러니까 미국의 클리어랜드란 곳에 모기를 없애려 뿌린 디디티가 생체농축과 먹이연쇄를 통해 극지까지 갔던 거야. 대단하지 않냐? 대단한데. 즉 에스키모처럼 동떨어진 인간에게도 인류의 결과가 집약될 수 있다는 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실은 그래서 인류의 모든 걸 지녔다고 말할 수 있지. 디디티를 살포하던 인간이 그 결과를 알았을까? 에스키모는, 자신이 지닌 결과의 원인을 알았을까? 즉 인간이란 누구나 인류의 원인이자 결과란 얘기지. 그리고 서로를 모르는 거야.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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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핼리혜성이 온다는 뉴스는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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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아무튼 얘야.

혜성 같은 건 오지 않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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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달의 뒷면이라 여겨도 좋을 만큼 주위가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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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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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달라졌다면

 

달라졌다 말할 수 있는 방학의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치수가 그렇게 사라졌으므로, 안짱다리의 달과 함께-어디서 슬림을 빨건 국수를 빼건, 그렇게 사라져주었으므로. 그러나 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방학이었다. 세계는 연둣빛 박을 발견한다 해서, 또 키위와 블루베리를 마신다 해서 달라지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래서 그사이 또다른 일이 있었고 - 어떤 이유가 있겠지, 나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며 세계를 체념케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는 과연 듀스스코어, 좋은 일은 연거푸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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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고 뜨거운 오후의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나는 남은 키위를 들이켰다.

 

 

핼리는 오지 않는대.

 

 

그럴 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모아이는 쉽게 수긍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우리는 기대를 거는 거야. 핼리를 기다리는 건, 말하자면 삶의 자세와 같은 거지. 그건 몸을 숙여 저편의 써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야. 나는 탁구를 모르니까 어떤 공도 받지 않겠다, 공 같은 건 오지도 마라 - 그건 인류가 취할 예의가 아니라고 봐. 마치 우리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혜성 같은 건 오지도 마라 - 그게 아니고 또 뭐냐는 거지. 그래서 우린 매달 한번씩 핼리가 오는 날을 정하고 기다리는 거야.

 

 

긴장된 삶이로구나.


겸손한 삶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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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방학 때 탁구 배웠댄다. 묻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힐끗 돌아볼 정도의 목소리로 안경잡이가 얘기했다. 킥킥킥킥 하는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조례가 끝나자 다수의 아이들이 안경잡이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장난을 치며 아이들은 교실을 향했다. 텅 비어가는 운동장의 한편에서 나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따. 가을이 시작된 하늘은 허무할 정도로 높고, 깊고, 비어 있었다. 우주의 대부분은 빈 공간, 인간과 인간의 사이도 대부분은 빈 공간이야. 결국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 은하와 은하 사이처럼 멀고도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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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문장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벌판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모아이에게 나는 손을 흔들었고,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발길을 돌렸다. 핑퐁, 경쾌한 소리가 마음을 울릴 만큼 숲의 공기는 상쾌했다. 천천히

 

 

나는 학교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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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중에서


실은, 인류는 애당초 생존한 게 아니라 잔존해왔다. 만약 인류가 생존한 것이라면 60억 중 누구 하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대체, 왜,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말하자면 이곳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잔존해왔다.

 

 

정신이 결코 힘을 이길 수 없는 이곳에서
희생하는 인간이
이기적인 인간을 절대 당해낼 수 없는 이곳에서

 

 

이곳은 어디일까. 남아 있는 우리는
뭘까?

 

 

 

 

 

 

 

 

한줄평 : 뭐 이런 책이 다있어 (나쁜뜻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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