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로맹가리도 써야하나,,,?



첫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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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여러분에게 맨 처음 해야 할 말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7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상황은 육중한 몸무게를 오로지 두 다리로만 버티고 있는 로자 부인에게는 정말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수많은 걱정과 괴로운 일에 파묻혀 살아온 그녀에게는 이미 몸에 익은 힘겨운 일상생활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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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창녀들이 젊었을 때는 쫓아다니지만 늙게 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내가 능력만 있다면 늙은 창녀들을 돌보아 주련만. 젊은 창녀들은 뚜쟁이가 있지만 늙은 창녀는 아무도 없으니까. 나는 늙고 못생기고 아무 소용도 없게 된 창녀들만 골라서 뚜쟁이도 되어 주고 돌보아 주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센 경찰과 뚜쟁이가 되겠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다시는 늙은 창녀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방에 내버려진 채 울고 있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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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에게, "롤라 아줌마, 아줌마는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또 누구와도 닮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기분이 좋아서는, "그렇단다, 모모야. 나는 꿈 속의 사람이란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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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혹시 그의 주머니에서 무슨 추억의 물건이라도 없을까 해서 뒤져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단지 푸른색의 골로와즈 담뱃갑만이 들어 있었다. 그 담뱃갑 속에는 아직도 한 개피가 남아 있기에 나는 그의 옆에 앉아서 그 담배를 피웠다. 왜냐하면 그 담뱃갑 속에 있던 담배들을 모두 그가 피웠을 테니까 내가 남은 한 개피를 피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나에게도 누군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쁨조차 느꼈다. 멀리서 경찰 자동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가 싫어서 얼른 7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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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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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몽 선생은 내 우산 아르뛰르를 찾으러 내가 살던 곳으로 가기까지 했다. 아르뛰르가 곁에 없는 것을 내가 몹시 슬퍼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르뛰르를 보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모두 그것을 반대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법이다.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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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솔직히 말해서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치 이국 땅에 사는 사람들처럼 그 나라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온갖 아름답고 심오한 생각을 말하고 싶어도 기초 회화책의 진부한 문장으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들과 같다. 머리 속에는 전하고 싶은 생각들이 들끓고 있음에도 기껏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정원사 아주머니 우산은 집 안에 있습니다> 따위인 것이다.

 

 

 

 

-

여러분은 불타는 하늘의 푸르름을 배경으로 색채의 움직임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모든 것이 엄청난 북새통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짐의 하역이며, 세관 검사 같은 것들이 다 그렇다. 모든 사람이 여러분에게 미소를 짓는 것 같다. 날은 뜨겁고 색채는 현기증을 일으킨다.

 

 

 

 

-

「스트릭랜드 본인도 그게 걸작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바랐던 걸 이룬 셈이죠. 자기 삶이 완성된 거예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다음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그걸 파괴해 버린 거죠.」

*각주에 따르면 마음에 들었어요 부분은 예쑬의 창조를 시의 창조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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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평균 연령 20세가량의 빌라 골목이다. 엊그제 막 신축이 끝나 건축 자재와 도배장판 냄새가 나며 카드키를 댈 때마다 LED 센서가 발광하는 빌라 옆으로, 마당에는 감나무가 서 있고 장마철이면 때때로 물이 차는 반지하방마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세 들어 사는, 40년 가까운 2층 주택이 나란히 자리한 식이다.



-

그리고 그 순간 명정은 로봇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것은 아내가 살아 있었을 적, 그녀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기 전 만약 둘째 아이가 태어난다면 제 형과 돌림자로 지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영원히 부를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던, 그러나 상상 속에서 수도 없이 불렀기에 낯설지 않은 존재의 이름이 구체적인 발음과 형태를 띠고 혀끝에서 흘러내리는 순간, 그는 이 유용한 도우미를 가족 비슷하게 맞아들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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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지 않아 이런 장면에 익숙해지고 시들해지겠지만 당분간 즐길 거리 정도로는 충분하다.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주고받을 상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늘 같은 자리에 떨어져 심장에 구멍을 내던 물방울의 낙햐 방향을, 조금이나마 바꾸었다는 것은.





-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

한번 질문을 삼키면 그것이 식도를 지나 위장에서 분해된 다음 몸 밖으로 영원히 배출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삭지 않는 밥알처럼 언제까지고 명치에서 맴도는 거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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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삶은, 아니 그냥 삶은, 어떤 것입니까."

한 쌍의 젓가락 끝이 달걀프라이의 중심을 찌르자 진한 노른자가 번져가는 얼룩처럼 흘러나온다.

"이거 만져봐."

"평소대로 반숙인데 뭔가 문제 있습니까."

"됐으니까 만져보라고."

은결이 달걀노른자를 건드리자, 실처럼 흘렀던 노른자가 본격적으로 깨지면서 손가락을 휘감는다. 그동안 내내 부쳐온 달걀의 촉감을 은결은 이제 처음으로 알았다.

"어때?"

"뜨겁습니다. 끈적거리고…… 비릿합니다."

"맞아, 그런거야."

은결은 고개 숙여 제 손을 들여다본다. 처음에는 삶이 달걀이라는 줄로 알아들었으나 곧 지시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촉각 센서가 그저 온도를 객관적으로 측정했을 뿐이며 인공피부에는 달리 손상이 없었지만 인간 어린이라면 빨갛게 짓무를 가벼운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쉽게 부서져버리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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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형태가 있는 건 더러워지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지우고 또 지웁니다. 어차피 다시 졸릴 테니 잠자리에 들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요."





-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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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를 클릭하던 의사의 손길이 점점 늦어지고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은결은 알아차린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이 오랜 세월 쌓아온 체질이다. 투철한 직업정신이나 사회적 위신 같은 여과지로도 걸러내지 못하는 불수의근의 움직임 같은 것이, 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에 존재한다. 문화와 인종을 넘어 사뭇 보편적인 몇몇 동작들이 있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 보거나 착각한 게 아닌지 공연히 안경을 벗곤 한쪽 눈을 비빈다. 상대방에게 이 소식을 어디부터 전하면 가장 좋을지를 궁리하며 턱을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가벼운 한숨.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리듬. 꿈틀거리는 목울대. 은결은 그 모습을 천천히 관찰하고 갈무리한다. 그것을 흉내 내고 익힌다 한들 자신이 인간의 몸짓과 비슷해질 리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

봐라, 네 안에는 물리학과 생물학뿐만 아니라 화학 천문학까지 들어 있지. 너는 지금까지 사람이 밝혀낸 한도 내에서 우주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을 거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 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

이해 불가능한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구전을 통해 허황되게 부풀려지는 것들. 존재의 진실성 여부가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수긍과 인정에 달려 있는 것들. 잊어버린 채 방기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노크해 오거나 부지불식간에 덜미를 잡아채는 것들. 실체를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과감히 렌즈를 들이대면 사라지는 것들. 그래서 때로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 것들.

그러므로 존재하기를 그만둘 게 아니라면, 차라리 이해하기를 멈춰야 옳은 것들. 은결은 그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로 그의 곁에 머물러왔다.





-

―무너진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건물이 아닌 사람이 무너진다는 의미를 분명히 학습한 적 있고 자신이 그렇게 될 일은 없으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 은결의 몸속에서 외부에 발산되지 않는 경보음을 비롯한 온갖 오류 메시지가 출력되고, 은결은 시호의 내민 손을 응대희 법칙에 따라 정중하게 쥐는가 싶더니 손끝이 닿는 순간 모로 무너져 내린다. 가장 먼저 후각이 꺼지고 촉각이 사라지며, 당황해서 이름을 부르는 시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야가 급격히 축소되는가 싶더니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외부 감시 및 감각 시스템이 강제 종료되며 은결의 눈꺼풀이 감긴다.






-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란 어떤 때입니까.

―지구상에 사람이 70억 명이나 되는데 그들 각자의 이유라면 70억 가지도 넘겠지만 너한텐 말해줄 수가 없구나. 말해본들 네가 알지 못할 좌절이기도 하고.

그때 은결의 머릿속에서 표적을 알지 못하는 방아쇠가 당겨진다. 다리의 신경을 지탱하던 인공세포들이 일순간 휘발되기라도 한 듯 은결은 욕조 깊이 주저앉는다. 옷이 빠르게 젖어든다. 욕조 등받이를 따라 엉덩이가 미끄러지고 거품이 입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인공장기가 외부의 이상 신호를 감지하고 팽창하는 감각. 주요 메모리 안으로 응축 및 집약되는 세계들. 어서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판단과, 이대로 머물렀을 때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와, 그 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예측 값 등이 한데 뒤엉킨다. 몸의 접합 부위마다 정교하게 장착된 인공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몸을 뚫고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 한다. 위험을 알리는 날카로운 버저가 머리를 울린다. 1분 뒤 터질 시한폭탄처럼 두근거리는 인공심장의 진동이 인공신경을 타고 달팽이관을 흔든다. 이어서 은결의 머리는 물속으로 완전히 잠긴다. 이대로라면 얼마쯤 지나선 방수장치가 내습 처리 용량의 한계를 넘어 심장에 물이 차오르는 감각이 전달되리라는 예측마저, 밀물처럼 눈앞에 쏟아지는 까만 어둠과 함께 중단된다.

―그 시간은 턱없이 짧은 탓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스며들지를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버리지.




-

끼릭끼릭끼릭

치잉 윙

철컥

이어지는 완전한 암전이야말로 로봇이 꿀 수 있는 유일한 꿈이다.




마지막

-

아이가 훗날 자라 그 약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대도, 그는 괜찮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아이가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완전히 멈출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이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언캐니밸리가 불쾌한 골짜기랑 같은 말인줄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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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푼의 시간은 구병모 작가님의 글 중에서 가장 최신작인데 나는 출판된 지 반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야 읽어보았다;ㅅ; 작가님의 책을 많~이 읽어본건 아니지만 읽어본 책들이 다 좋았기에 이번에도 큰 기대를 걸고 읽었었음

- 주인공은 가족 중 홀로 남아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 그리고 어느날 죽은 아들의 이름으로 배송되어 온 로봇 '은결' 이다.

- 사실 내심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초반에는 소재에 살짝 실망을 했었다. 물론 우리의 생활에서 로봇은 아직 대중화 되지도 않았고,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고 많은 보수기간을 거칠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와 매체에서 로봇은 이미 식상한 클리셰 소재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지나치게) 자주 노출되었다. 작가의 말에서도 마르고 닳은 로봇의 감정발생 서사 라는 이야기가 나올정도니까...


- 명정이 왜 은결에게 정을 느끼게 되었는지가 사실은 잘 공감이 잘 안되었었다. 이름의 힘일까 라고 생각을 해봐도(언어의 힘은 강하니까!)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는데, 이야기의 중점이 명정이 아닌 은결이라고 생각해버리니까 한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쭉 훑어보니 오히려 그런 절제되고 최소화된 감정 묘사가 이 소설을 숱한 로봇 이야기들과 다르게 만들어주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 로봇의 눈으로 본 인간은 생각했던것보다 더 복잡했고 '관계'안에서 상호작용 하려면 무한의 알고리즘이 필요한 그런 성가신 존재였다. 


- 꽃씨 소재가 참 좋았고, 자살 소재도 정말 좋았는데 '다른 경우였다면 더 와닿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마음속에 인간 / 로봇 선이 너무 강하게 그어져 있어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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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 전쟁이 끝나가던 해 겨울, 그녀는 한 거지 여자에 의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

어느 날, 금복이 여느때처럼 시장에 나가 물고기의 배를 따고 있을 때였다. 시장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한꺼번에 부두로 몰려가고 있었다. 금복도 호기심에 사람들을 따라가보니 구경꾼들로 잔뜩 둘러싸인 부두 한가운데에서 뭔가 작업이 진행중이었다. 구경꾼을 헤치고 안을 들여다보던 금복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안에선 사내들이 칼을 들고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 물고기는 언젠가 그녀가 바닷가에서 보았던 바로 그 대왕고래였다. 사내들이 작두만한 칼로 거침없이 고래의 배를 썩썩 가르자 피와 내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구경꾼들은 이리저리 몸을 피해야했다. 뒤이어 볏가마니보다 더 큰 밥통 안에서 닻과 돛, 낡은 그물과 뒤엉킨 낚싯줄 같은 어구들과 배에서 떨어져나온 것이 분명한 나뭇조각, 여러 종유의 해초들과 작은 물고기들이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은 물건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탄성을 질러댔지만 금복은 왠지 자신의 살을 베어내는 것처럼 마음이 쓰라렸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생명체가 그렇게 덧없이 고깃덩어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내장을 다 드러낸 채 해체되어가는 고래의 처지가 마치 걱정과 자신의 처지처럼 여겨져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올랐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삼키느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구경꾼들 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주저앉아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

춘희에게 금복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도 같았으며, 춘희의 바람은 끝내 채워질 수 없는 허기와도 같았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그녀를 평생 따라다닐 아득한 그리움이 되고 말았다.





-

금복의 눈엔 수련이 하는 짓 모두가 애교요, 재치요, 매력이었다. 그것은 사랑의 법칙이었다.





-

흙과 불과 물로 빚어낸 벽돌은 공간을 가르고 비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온기를 보존하고 공기를 정화해주는 훌륭한 건축자재였지만 그런 실용적인 쓰임새는 춘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벽돌은 떠나간 사람들을 향한 비밀스런 신호이자 잃어버린 과거를 불러오는 영험한 주술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사라지는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춘희는 뭔가 더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미처 입을 뗄 사이도 없이 둘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광대한 성간에는 희미한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꼬마 아가씨, 안녕.

코끼리, 너도 안녕.

-

불을 켜지 않고 밤의 어둠 속에서 소녀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앉는다. 책상 위에 두 손을 얹고, 그녀가 방 안에 남기고 간 아련한 여운 속에 내 몸을 적신다. 눈을 감고 거기에 있는 소녀의 마음속 떨림을 퍼 올려 내 마음에 스며들게 한다. 나는 눈을 감는다.





-

나는 지갑 속에서 나와 누나가 해변에서 놀고 있는 사진을 꺼낸다. 오시마 상은 그 사진을 한동안 보고 나서 미소 지으며, 나에게 돌려준다.

"해변의 카프카"라고 오시마 상은 말한다.





-

내 심장이 다시 메마른 소리를 낸다. 누군가가 망치로 내 마음의 벽에 긴 못을 박고 있다.





-

"저, 오시마 상. 혼자 있을 때 상대를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이 된 적이 있어요?"

"물론"하고 그는 말한다. "이따금 있지. 특히 달이 창백하게 보이는 계절에는. 특히 새들이 남쪽으로 건너가는 계절에는. 특히 ……."

"어째서 물론이죠?"하고 나는 묻는다.

"누구나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 되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잃어버린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기분은 네가 발명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특허 신청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다무라 군은 강해지고 싶은가 보지?"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특히 제 경우에는."

"다무라 군은 외톨이니까."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힘으로 살아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 합니다. 무리에서 외따로 떨어진 까마귀나 같죠. 그래서 저는 카프카라는 이름을 저에게 붙였습니다. 카프카란 체코 말로 까마귀라는 뜻입니다."

"흐응"하고 그녀는 조금 감탄한 듯이 말한다. "그래서 다무라군은 까마귀구나?"

"그렇습니다"하고 나는 말한다.

그렇습니다,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

내 속에는 텅 빈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지금도 조금씩 부풀어 올라, 그것이 내 속에 남아 있는 알맹이를 자꾸만 먹어치운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나라는 존재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간다.





-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

"즉 네가 숲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일부가 되고, 네가 빗속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쏟아지는 비의 일부가 되지. 네가 아침 속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아침의 일부가 되고, 네가 내 앞에 있을 때 너는 내 일부가 돼. 간단히 말하면 그런 이야기야."





-

"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야"하고 사에키 상이 말한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

"왜냐하면 넌 거기에 있었거든. 그리고 나는 그 옆에서 너를 보고 있었고. 아주 오래전에 그 해변에서. 바람이 불고, 새하얀 구름이 떠 있고, 계절은 언제나 여름이었지."





-

나는 창틀에 손을 올려놓고 그녀가 사라진 부근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무언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에키 상은 돌아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만 부재라는 형태가 웅덩이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

나는 식탁으로 돌아가서 의자에 앉는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컵에는 아직 허브 차가 조금 남아 있다. 나는 컵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둔다. 그 컵은 머지않아 잃어버릴 기억의 은유처럼 보인다.





-

말로 설명해도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 건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제일 좋지.





- 끝문장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어."하고 나는 말한다.

"그림을 보면 알게 돼"라고 까마귀 소년은 말한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에겐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넌 이제 잠을 자는 것이 좋겠어"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 거야."

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

두세달동안 엄청나게 긴 호흡으로 읽었던 책

공허가 내 알맹이를 먹어치운다는 구절이 어찌나 와닿던지.

어린이도 학생도 근로자도 부모도 스승도 나는 누구란 말인가(와 비슷한 내용의 오은시인의 시가 요즘들어 부쩍 떠오른다.)


이 책은 꿈같은 이야기와 현실적인 자아성장록을 넘나든다. 고독으로 둘러싸인 카프카는 결국 고달파도 현실에 돌아갈 것을 다짐한다. 숲에서 빠져나오던 카프카가 뒤를 돌아보고, 판타지적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누구든 속마음 깊숙한 곳에 간신히 숨겨놓고 있는 도피욕망..... 아무튼 이부분은 오르페우스 신화구조를 차용한 것이겠고, 이야기의 큰 틀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기반한다.



릴리슈슈의 모든것 ost 첫번째 트랙인 sight를 켜놓고 읽었다. "해변의 카프카"테마라고 얘기해도 믿을만큼 엄청 잘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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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문장 :

 

"그래, 돈 마련은 그럭저럭 끝냈단 말이지?"하고 까마귀라고 불리는 소년은 말한다.

 

 

 

 

 

-

"내 말 잘 들어. 엄청나게 지독한 모래 폭풍을 상상해 봐"하고 그가 말한다. "다른 모든 일은 모두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야."

그가 시키는 대로, 엄청나게 지독한 모래 폭풍을 상상한다. 다른 일은 모두 완전히 잊어버린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내 속은 텅 빈 것 같다. 모래 폭풍이 곧 머리에 떠오른다. 늘 그랬듯이 나와 까마귀 소년은 아버지 서재의 낡은 가죽 소파 위에서 그 모래 폭풍을 함께 상상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운명이란 끊임없이 진행하는, 방향을 바꿔가며 어느 특정한 지점에 집중되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하고 까마귀 소년은 나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시 또 모래 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조차 없어.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런 모래폭풍을 상상하란 말야.

 

 

 

 

 

-

"넌 지금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되어야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터프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네 스스로 이해해야만 하는 거다, 알겠지?"

 

 

 

 

 

-

그리고 물론 너는 실제로 그놈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될 거야. 그 맹렬한 모래 폭풍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이고 상징적인 모래 폭풍을 뚫고 나가야 하는 거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놈은 천 개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네 생살을 찢게 될 거야. 몇몇 사람들이 그래서 피를 흘리고, 너 자신도 별수 없이 피를 흘리게 될 거야. 뜨겁고 새빨간 피를 너는 두손으로 받게 될 거야. 그것은 네 피이고 다른 사람들의 피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

한밤중에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나는 이따금 잠에서 깨어 싸구려 커튼 사이로 밤의 고속도로 풍경을 바라본다. 빗방울이 소리를 내면서 세차게 차창을 두드리고,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 불빛을 흐려놓고 있다. 가로등은 같은 간격을 유지하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다음 순간에는 이미 낡은 빛이 되어 등 뒤로 사라진다. 문득 시계를 보니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마치 앞으로 떠밀린 것처럼 나의 열다섯 번째 생일이 찾아온다.

 

 

 

 

-

나도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어. 하지만 하나만은 말할 수 있지. 요컨대 어떤 종류의 불완전함을 지닌 작품은 불환전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적어도 어떤 종류의 인간의 마음을 강렬하게 끌어당긴다는 거야.

 

 

 

 

-

"내가 운전하면서 자주 슈베르트를 듣는 것은 그 때문이야.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게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든 불완전한 연주이기 때문이지. 질이 높은 치밀한 불완저함은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고 주의력을 일깨워주거든. 이것 이상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완벽한 음악과 완벽한 연주를 들으면서 운전을 하다간, 눈을 감고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D장조 소나타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한계를 듣게되지. 어떤 종류의 완전함이란 불완전함의 한없는 축적이 아니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거야. 그것이 나를 격려해 주거든. 내가 뭘 말하는지 알겠어?"

 

 

 

 

-

나는 슈베르트의 소나타에 귀를 기울인다.

"어때, 지루한 곡이지?"하고 그가 말한다.

"네, 확실히"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한다.

"슈베르트는 훈련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지. 나 역시 처음에 들었을 때는 지루했어. 네 나이라면 그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인간은 이 세상에서 다분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에는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되고,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대개 지루한 것이라는 걸. 그런 거야. 내 인생에는 지루해할 여유는 있어도 싫증을 느낄 여유는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두가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지만."

 

 

 

 

 

-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그 말은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히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오시마 상이 이 의자에 앉아서 뾰족한 연필을 손에 들고 책 표지 안쪽에 메모를 쓰고 있는 광경을 상상한다. 꿈속에서 책임은 시작된다. 그 말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

 

 

 

 

 

-

나는 그 찬란한 밤하늘 아래서, 다시 격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숨이 답답해지고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이처럼 엄청난 수의 별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나는 살아왔는데도, 그들의 존재를 지금가지 인식하지 못했다. 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별뿐만이 아니다. 그 밖에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나 모르는 것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나 자신이 구제할 길 없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가도 가도 끝없이 그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

"우선은 남들처럼 인사부터 하지. 하지만 인사가 끝나면 즉시 이별이 시작되네. 헬로, 굿바이― 활짝 핀 꽃에 불어 닥친 폭풍이라는 비유도 있잖은가. 작별만이 인생이라네."

 

 

 

 

-

"너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었어. 너는 무언가를 강렬하게 찾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피하려 하고 있다고. 네게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

 

 

 

 

 

-

"경험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이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원할 때 그것은 대게 찾아오지 않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할 때, 그것은 저쪽에서 자연히 찾아오고 말이야. 물론 그것은 일반론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야.

 

 

 

 

 

-

"뒷이야기에서 틀림없이 커다란 전환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네 말대로야."하고 오시마 상이 말했다. "그것이 이야기의 공통적인 구성 요소지. 커다란 전환. 의외의 전개. 행복은 한 종류밖에 없지만, 불행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야. 톨스토이가 지적한 대로 말이야. 당사자 이외의 타인에게 행복이란 교훈적인 우화이고, 불행이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일 경우가 많지.

 

 

 

 

 

 

-

"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예전에 이 방에서 살았던 소년일지도 모른다. 사에키 상이 사랑했던 동갑내기 소년. 스무 살 때 학생운동에 말려들어 의미 없이 살해당한 소년.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든다. 풍경도 이 부근 해변의 모습 같다. 만일 그렇다면, 이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은 사십 년쯤 전의 풍경일 것이다. 사십 년이라는 세월은 나에게는 거의 영원처럼 생각된다. 시험 삼아 사십 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그것은 우주의 끝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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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야. 그것을 네가 좀 이해해 주었으면 해. 나는 괴물이 아니야. 보통 인간이지.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행동하지. 그러나 그 사소한 차이가 때로는 끝없는 심연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그야 물론,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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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마 전부터 갑자기 나카타는 고양이 상하고 이야기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세계는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고, 나카타 상. 매일 때가 되면 날이 밝지. 그러나 거기 있는 건 어제와 똑같은 세계는 아니지. 여기 있는 건 어제의 나카타 상이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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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내 말 잘 들어, 다무라 카프카 군. 네가 지금 느끼는 것은 수만흔 그리스 비극의 동기가 되기도 한거야. 인간이 운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인간을 선택한다, 그것이 그리스 비극의 근본을 이루는 세계관이지. 그리고 그 비극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하고 있는 것이지만―아이러니컬하게도 당사자의 결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사자의 장점을 지렛대로 해서 그 비극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거야. 내가 말하는 걸 알 수 있겠어? 다시 말하면 인간은 각자가 지닌 결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질 즉, 타고난 장점이나 아름다운 성질에 의해서 더욱 커다란 비극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거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그 뚜렷한 본보기라고 볼 수 있어.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 게으름이나 우둔함 때문이 아니라 그 용감성과 정직함 때문에 그의 비극은 초래되었거든. 거기에 불가피하게 아이러니가 생겨나는 거야."

 

 

 

 

 

-

다시 불을 켜고 침대에 일어나 앉은 채 아침을 맞는다. 책을 읽을 수도, 음악을 들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다만 거기 일어나 앉아서 아침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늘이 희끄무레해지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잠자는 동안에 나는 운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베개는 차갑게 젖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에 흘린 눈물인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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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징의 대상은 아마도 언젠가의 시간이며, 어딘가의 장소이다. 그리고 또 일종의 마음의 존재 방식이다. 그녀는 그와 같은 행복한 우연의 만남에서 빚어진 요정처럼 보인다. 영원히 상처 입을 리 없는 청순하고 순진무구한 상념이 그녀 주위에 다사로운 봄빛의 포자처럼 떠돌고 있다. 사진 속에서 시간은 딱 정지되어 있다. 1969년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풍경이다.

 

 

 

 

 

-

그리고 카프카라는 이름―사에키 상은 그 그림 속의 소년이 자아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고독을, 카프카의 소설 세계와 결부해서 파악한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렇게 때문에 그녀는 소년을 '해변의 카프카'라고 불렀다. 부조리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을 방황하고 있는 외톨이인 영혼. 아마 그것이 카프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

추천의 말 중에서

 

프랑스 현대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우리의 삶이란 끄덕끄덕 졸다가 깜빡 깨어나고 다시 끄덕끄덕 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은 현실이 견딜 수 없어 늘 꿈을 꾼다. 저것만 얻으면 더 이상 소망이 없겠지. 그러나 막상 그것을 얻는 순간 그는 퍼뜩 깨어난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이 스르르 미끄러지는 것을 발견한다. 텅 빈 손을 참을 수 없어 그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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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경백."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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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이 끝났다. 호송차에 오르기 위해 재판소에서 나올 때, 나는 매우 짧은 한순간 여름날 저녁의 냄새와 색깔을 다시 느꼈다. 호송차의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한 도시의 온갖 친숙한 소리들,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던 어떤 시각의 온갖 친숙한 소리들을 마치 내 피로의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양 하나씩 다시 떠올렸다. 이미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대기를 가르는 신문팔이들의 외침소리, 작은 공원의 마지막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들의 호객소리, 시내 급커브길을 도는 전차의 마찰음, 항구에 어둠이 내리기 전에 하늘에 깃드는 아련한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행로, 내가 눈감고도 걸을 수 있었던 행로를 내게 다시 그려주었다. 그렇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던 시각이었다.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언제나 가벼운 잠, 꿈도 없이 가벼운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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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이야기를 듣는데 열중했음에도 가꿈 나도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는데, 그때마다 내 변호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잠자코 있어요, 그게 더 낫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를 제외한 채 사건이 다뤄지고 있는 셈이었다. 모든 것이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내 의견의 청취 없이,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귀를 귀울였고, 나를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한 평범한 인간의 장점이 한 죄인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러나 그 모든 장광설들, 내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 그 모든 날들, 그 끝없는 시간들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이 무색의 물, 내가 그 속에서 현기증을 느꼈던 무색의 물처럼 되어버리는 인상을 받았다.

 

결국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내 변호사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아이스크림 장수의 나팔소리가 거리로부터 여러 방과 여러 법정을 거쳐 내 귀에까지 울려 퍼졌다는 사실뿐이다.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삶,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더없이 소박하고 더없이 끈질긴 기쁨을 발견했던 삶에 대한 추억에 사로잡혔다. 이를테면 여름 냄새, 내가 좋아했던 동네, 저녁 하늘, 마리의 웃음과 원피스가 내게 준 기쁨에 대한 추억 말이다.

 

 

 

 

 

-

내가 그에게 그만 가달라고, 나를 혼자 있게 해달라고 말하려 했을 때, 그가 갑자기 나를 향해 돌아서며 폭발하듯 소리쳤다. "아니, 나는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도 다른 하나의 삶을 소망한 적이 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나는 물론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은 부자가 되거나, 헤엄을 아주 잘 치거나, 더 잘생긴 입을 가지기를 소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게 없다고 대답했다. 둘은 동일한 차원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끊었고, 내가 그 다른 하나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자 나는 "내가 현재의 이 삶을 추억할 수 있는 하나의 삶"이라고 소리쳤고, 연이어 이제 그런 이야기에 진력이 난다고 말했다.

 

 

 

 

 

 

-

마지막

 

그가 떠난 후,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했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로 별들이 가득 보였기 때문이다. 전원의 소리가 내 귓전까지 올라왔다. 밤의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적셨다. 이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마치 밀물처럼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그때, 밤의 어둠 저 끝에서 뱃고동이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이제 나는 왜 엄마가 삶이 끝날 무렵에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엄마가 삶을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거기, 거기에서도, 뭇 생명이 꺼져가는 양로원 주위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욕망이 일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로 인해 눈물을 흘릴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내게서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비워준 듯, 신호와 별들이 가득한 밤의 어둠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가슴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그토록 형제 같으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결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일은 처형일 날 모쪼록 많은 구경꾼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를 소망하는 것뿐이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는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의 빈민가로 이사했고, 가정부 일을 하며 두 아들 뤼시엥과 알베르를 키웠다.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웠고 글을 읽을 줄 몰랐기에 늘 침묵 속에서 살았다. 유명 작가인 아들의 글을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던 것은 어머니에게 크나큰 슬픔이었으리라.

 

 

 

 

 

 

 

 

 

 

 

 

-

 

“쓴다는 것, 그것은 최고로 고독한 삶이다.

 

작가는 고독 속에서 작품을 완성하며 그리고 정말 훌륭한 작가라면 날마다 영원성이나 영원성의 부재와 맞서 싸워야만 한다.”

 

- 1954년, 노벨문학상 당선 소감,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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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구 (김이환)

 

 

 

 

 

-

첫문장

 

"……을 조심하게 젊은이."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남자의 어깨에 부딪히면서 건넨 말이었으나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남자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

그들은 새로운 유희를 찾기 시작했다. 남자는 게임을 발견했고, 청년은 영화를 찾아냈다. 그들은 전자제품 매장에서 게임기와 디브이디 플레이어를 꺼내 가장 좋은 텔레비전과 연결하고 스피커까지 다 세팅한 다음, '세계는 멸망했습니다'라는 파란 화면이 사방에 켜진 그곳에서 게임과 영화로 시간을 보냈다.

 

 

 

 

-

청년이 말했다.

"다 죽어도 싼 놈들이에요."

"너 지금 나한테 맞았다고 그런 말로 화 푸는 거지?"

"다 잘 죽었어요. 동물은 멸종하고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은 더러워지고. 서로 싸우고 죽이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인간이야말로 추한 존재예요. 다 죽었으니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지랄하네. 나는 사람이 너무 그리워. 어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마트로 찾아오는 꿈을 꿨어. 우리처럼 서로 손을 묶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구에게 흡수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서로 손을 묶으면 구에 흡수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여서 같이 삽시다, 그러더라. 그중에 부모님도 있었는데, 내가 부모님에게 막 다가가려는 순간 꿈에서 깼어. 네가 오줌 마렵다고 화장실 가자고 깨워서. 개새끼, 너만 아니었으면 꿈에서 부모님하고 얘기도 좀 해봤을 텐데."

 

 

 

 

-

남자는 세상에 홀로 남았다.

 

 

 

 

-

끝문장

 

그는 길에 도착했다. 그는 길을 뛰었고 더 멀리, 그리고 더 멀리 도망쳤다. 그는 더 먼 곳으로 도망쳤고, 다시 도망쳤다. 끝없이 도주했다. 남자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절망을 피해 도망쳤다. 이것은 남자의 도주에 대한 기록이다. 남자는 도망친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는 죄다 더럽게 진부하고 평면적이며 부수적인 서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책편식이 심한 편이라 요즘 한국 현대소설 위주로 읽고 있는데 대체 언제쯤 입체적이고 통통 튀는 여성 캐릭터를 만날 수 있을까. 그것도 주인공이면 좋으련만 

 

아 이야기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흡입력이 어마어마한 소설이다. 보통 며칠에 걸쳐 쉬엄쉬엄 읽는 독서습관을 가진 내가 몇시간만에 다 읽어버렸으니까. 참신하고 박진감넘치고 다 좋은데 결말이 허무하고, 결말에 다가가는 과정에 힘이 없으며 뭔가 더 끌어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고 얕게 마무리된 이야기같아서 아쉬움. 그리고 이 이야기만큼 극단적이진 않겠지만 요즘 사람들 마음속에 너나 나나 검은 구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덧붙여서 난 요즘 그 구가 열심히 감수분열하고 있는 중이라 더 쫓기는 기분으로 읽음. 차라리 진짜 이런 구가 나타나서 다 리셋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기도 함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까 그건 너무 슬플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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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서효인, 「저글링」에서

 

 

 

 

-

첫문장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 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

아, 저 아이가 강 박사의 딸이구나. 저 아이는 그날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아니면 예쁜 옷 한 벌이라도 새로 해입었을까. 요즘 아이들 옷은 터무니없이 비싸다던데 그걸론 모자라지나 않았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문득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자기 입 근육이 삐었나 보다 싶으면서도 미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감과 숭고한 대상화.

 

 

 

 

-

그녀는 아비나 조부모 중 누구의 실수인지 아이의 목뒤에 반쯤 떨어지다 만 상표 태그가 삐져나온 것을 못 본 체하며 돌아선다. 그녀는 한 달 전 3번 진료실을 나서며 느꼈던 감각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며, 이 조손을 바라보면서 그때의 감각을 굳이 상기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룬 살점과 핏방울과 뼛조각을 잊고 긴장을 풀린 채 따뜻한 꿈을 꿀 뻔했던 순간을, 소독약과 스킨 섞인 독특한 냄새를, 한 폭 주단과도 같던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마음속에 피어오른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 접속했기 때문에 생겨난 작은 흥분에 불과하며, 거기 몸을 깊이 담그지 못하고 발만 살짝 적셨다가 돌아 나온 데서 비롯한 아쉬움의 반영일 뿐이다.

 

 

 

 

-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이.

 

 

 

 

-

쓰러지면서 방향을 잃은 핏줄기가 소년의 발과 복도 바닥을 적셔서 순식간에 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하자 피 냄새일 것으로 짐작되는 입자들이 콧속을 타고 간질였는데 이상한 건 지금 눈앞에 아버지의 붉은 버리통이 있으니 이게 피 냄새인가 보다 싶을 뿐 소년이 느끼기에는 피바다에서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비린내나 시취가 아니라 따뜻하고 폭신한 팬케이크에 끼얹어진 메이플 시럽 냄새 같다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머리통이 자기 발을 짓누르고 있음에도 그저 바니타스 정물화처럼 내려다볼 뿐 그 자리에서 돌아 나가 경비실로 기어 내려갈 생각조차 못한 것은 그 모순되는 냄새 때문이었을 텐테, 어떻게 죽음이 이토록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를 풍길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리더십을 함양하는 논리 논술 철학 학웡네서 익혀온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이었기에 소년의 온몸에서 현실감이 각질처럼 떨어져 나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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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가벼운 인사일 뿐이라도,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

단 한 가지, 조각은 일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의뢰인이 스스로 세상을 떠날 것만 같다는 예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정확하게는 그 의뢰인이 한때 갖고 있었던 가족, 그것이 어떤 느낌이며 그것을 불의의 방식으로 잃었을 때 한 사람의 정신이 어느 정도 손상을 입는지, 과육에서 떨어져 나온 사과 껍질 같은 생의 잔여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다. 비록 두꺼운 선글라스 너머에 자리한 슬픔의 심연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동공 대신 지지대를 잃은 반연식물의 정처 없음을 포착한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

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

그러는 동안 조각은 자리에 일어설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을, 그보다는 좀더 명확한 감정으로 사실은 선뜻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는 자신의 속내를, 이 자리에 앉아서 듣고 싶었던 건 과일의 당토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목소리였음을 깨닫는다.

 

 

 

 

-

말랑말랑한 감촉으로 봐서 달 줄이야 알았지만 입에 넣으니 주인 여자의 말 이상이다. 혀에 감긴 귤 알맹이가 부서지면서 입안을 달콤하고도 청량한 감각으로 채우고, 세로토닌이 한껏 상승한 상태에서 조모와 손녀를 바라보자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스럽다. 나름의 아픔이 있지만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지바른 곳의 사람들,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날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들을 응시하는 지금이 좋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언감생심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

 

 

 

 

-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비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

류는 둘이 나이 차이도 다섯 살밖에 나지 않으니 조와 언니 동생 먹고 편하게 지내라 했지만 조각은 류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에 방파제를 치기 위해 어디까지나 서어한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고수하고 있었다.

 

 

 

 

 

-

"네가 없으면 이제는 내가 불편해. 그러니까 관둬."

그 정색하는 얼굴을 본 순간, 그것이 한 여인을 붙잡음이 아닌 수족 같은 부하나 비서를 묶어두려는 것인 줄 알면서도 조각은 마음 어딘가 파인 도랑에 미온수가 고였다.

 

 

 

 

 

 

-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깉은 애도. 어떤 구체적인 설명이나 동의도 없이 자연스레 그리된 입맞춤도, 깍지를 낀 서로 다른 두 개의 손도 절망과 슬픔의 진혼 행위. 그래서 이어져 있는 듯하지만 철저하게 하나가 아닌. 다만 이 순간 죽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현재를 견디기 위함인 동시에 눈앞에 살아 있는 사람의 호흡을 확인하는 차원에 머무는 의식. 하여 꿈으로만 그리던 류 옆에 있으면서도 조각은 그와의 밀착에 충분히 반응할 수 없었다. 익지 않은 감정은 진혼과 함께 영원히 봉인되리라는 걸 그녀는 예감했고, 그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류에게 나눠주는 체온으로써 자신의 한 시절을 종결되리라는 걸 알았다.

 

 

 

 

-

안전만을 고려한다면 정처 없는 여관 생활을 계속하는 편이 나았겠지만 류는 자주 들어오지 않는 집일망정 사람에게는 등 붙이고 머물 곳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류같은 사람이, 그것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가족을 잃고 나서도 집에 대한 기초 신화를 견지한다는 건 의아한 일이었다.

 

 

 

 

-

"가방이랑 겉옷 그대로 있는데, 화장실 간다고 나간 지 오래됐는데, 지금 보니 화장실에 없다고……."

말을 듣는 강 씨의 머리에 피가 몰리고 심장이 난폭하게 뛰기 시작한다. 원인 불명의 이변이 일상을 압도하고 대상 모를 두려움이 구체적인 질감을 갖춘다.

 

 

 

 

 

-

그녀는 잠든 무용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깊이 파고들어보다가, 무용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참을 그 자세로 손가락만 대고 있다. 슬며시 흔들어보는 무용의 몸은 무겁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

희미해지던 양치식물의 냄새가 사라지고 그녀는 투우의 눈을 감긴 다음, 역시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

끝문장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 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나왔다 one of my 최애작가님

책내용은 사실 다 읽고 며칠곱씹어보면 그렇게 특출하게 느껴지진 않는데(안좋다는 말이 아님) 문체랑 표현이 너무나 내 마음에 들어서 늘 와 와 하면서 읽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함. 

이번책은 전보다 모르는 단어가 많았는데, 모르는걸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이상한 강박증덕택에 책을 읽다가 중간중간에 사전을 켜서 단어 뜻을 찾아봤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짜증이 올라오지 않았다. 깊이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이 시대에 제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어스(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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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시간 - 한강

 

 

 

 

 

-

첫문장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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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여자는 묵묵히 올려다본다. 첫 시간에 그것을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古지도 같다고 생각했다.

 

 

 

 

 

-
밤은 고요하지 않다.
반 블록 너머에서 들리는 고속도로의 굉음이 여자의 고막에 수천개의 스케이트 날 같은 칼금을 긋는다.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
오늘 아침, 이 얇은 초록색 책이 다시 생각나 창고의 트렁크에서 꺼내왔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다가 거친 필체의 메모를 발견했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라고 보르헤스가 구술한 문장 바로 아래였다.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이어서 독일어로 생명, 생명이라고 흘려썼다가 굵게 가로로 선을 그어 지운 흔적이 보였다.
분명히 내 필체인데, 언제 그것을 적어넣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독일에서 학생들이 노트 필기할 때 사용하는 짙은 청색 잉크 글씨라는 것만 알아볼 수 있었다.

 

 

 

 

 

-
볼 때마다 다른 색깔의 화려한 사리를 쓰고 있던 당신의 벵골인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답습니까. 차디찬 회색 눈으로 내 안구를 들여다보던 늙은 독일인 아버지는 아직 안과의사입니까. 당신이 낳았다는 딸은 이제 많이 자랐습니까. 이 편지를 읽는 지금, 당신은 아이를 외조부모에게 보이려고 잠시 다니러 온 참입니까. 당신이 쓰던 북쪽 방에 머물면서, 이따금 유모차를 밀고 나가 강가를 산책합니까. 당신이 좋아했던 오래된 다리 앞의 벤치에 앉아 쉬며, 늘 호주머니에 담고 다니던 필름조각들을 꺼내 눈에 대고 태양을 올려다봅니까.

 

 

 

 

 

-
나는 침묵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던 당신은 수첩을 덮어 도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
당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희랍식 논증의 방식으로 이따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게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

......당장, 나가!
그 목소리.
겨울 밤 창문 틈을 할퀴며 들어오는 바람 소리. 실톱이 쇠 위에서 소리치고 유리창이 갈라지는 소리. 당신의 목소리.
나는 더듬더듬 배로 기어가 다시 당신의 다리를 안았습니다. 정말 몰랐습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기로 당신이 나무토막을 집어 내 얼굴을 쳤을 때, 내가 즉시 기절했을 때, 델 것 같은 눈물이 내 눈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을 당신은 보았습니까.

 

 

 

 

 

-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

방금 목욕시키고 침대에 함께 누운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사과 냄새 같은 거품비누 향이 났다. 아이의 동그란 눈 속에 그녀의 얼굴이 비쳐 있는 것이 보였다. 비쳐 있는 그녀의 눈 속에 다시 아이의 얼굴이 비치고, 그 얼굴 속 아이의 눈에는 또다시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었다.

 

 

 

 

 

-

지금쯤은 고백해도 괜찮을까.
네가 연습하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나는 투덜거리곤 했지만, 너는 다혈질의 성격대로, 오랜 시간 훈련받은 성량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밀어붙이곤 했지만, 아마 넌 짐작 못 했을 거야. 서울보다 추웠던 푸랑크푸르트에서 맞은 독일의 첫 겨울, 낯선 교실과 언어와 사람들에 지쳐 돌아온 내가, 아파트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네 노래를 들으며 벽에 기대 앉아 있곤 했다는 걸. 그 목소리가 어떻게 내 얼굴을 만져주었는지.

 

 

 

 

 

-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같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
당신은 아마 짐작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따금 나는 당신과 긴 대화를 나누는 상상을 했는데.
내가 말을 건네면 당신이 귀 기울여 듣고, 당신이 말을 건네면 내가 귀 기울여 듣는 상상을 했는데.
텅 빈 강의실에서 희랍어 수업의 시작을 기다리며 함께 있을 때, 그렇게 실제로 당신과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당신은 절반, 아니 삼분지 이쯤, 아니, 그보다 더 부서져버린 사람처럼, 무엇인가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벙어리 사물처럼, 무슨 잔해처럼 거기 있었는데. 그런 당신이 무서워지기도 했는데. 그 무서움을 이기고 당신에게 다가가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았을 때, 당신도 문득 몸을 일으켜 꼭 그만큼 다가와 앉을 것 같기도 했는데.

 

 

 

 

 

-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끝문장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너무 좋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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