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구 (김이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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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을 조심하게 젊은이."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남자의 어깨에 부딪히면서 건넨 말이었으나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남자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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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새로운 유희를 찾기 시작했다. 남자는 게임을 발견했고, 청년은 영화를 찾아냈다. 그들은 전자제품 매장에서 게임기와 디브이디 플레이어를 꺼내 가장 좋은 텔레비전과 연결하고 스피커까지 다 세팅한 다음, '세계는 멸망했습니다'라는 파란 화면이 사방에 켜진 그곳에서 게임과 영화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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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말했다.

"다 죽어도 싼 놈들이에요."

"너 지금 나한테 맞았다고 그런 말로 화 푸는 거지?"

"다 잘 죽었어요. 동물은 멸종하고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은 더러워지고. 서로 싸우고 죽이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인간이야말로 추한 존재예요. 다 죽었으니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지랄하네. 나는 사람이 너무 그리워. 어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마트로 찾아오는 꿈을 꿨어. 우리처럼 서로 손을 묶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구에게 흡수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서로 손을 묶으면 구에 흡수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여서 같이 삽시다, 그러더라. 그중에 부모님도 있었는데, 내가 부모님에게 막 다가가려는 순간 꿈에서 깼어. 네가 오줌 마렵다고 화장실 가자고 깨워서. 개새끼, 너만 아니었으면 꿈에서 부모님하고 얘기도 좀 해봤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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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세상에 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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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문장

 

그는 길에 도착했다. 그는 길을 뛰었고 더 멀리, 그리고 더 멀리 도망쳤다. 그는 더 먼 곳으로 도망쳤고, 다시 도망쳤다. 끝없이 도주했다. 남자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절망을 피해 도망쳤다. 이것은 남자의 도주에 대한 기록이다. 남자는 도망친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는 죄다 더럽게 진부하고 평면적이며 부수적인 서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책편식이 심한 편이라 요즘 한국 현대소설 위주로 읽고 있는데 대체 언제쯤 입체적이고 통통 튀는 여성 캐릭터를 만날 수 있을까. 그것도 주인공이면 좋으련만 

 

아 이야기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흡입력이 어마어마한 소설이다. 보통 며칠에 걸쳐 쉬엄쉬엄 읽는 독서습관을 가진 내가 몇시간만에 다 읽어버렸으니까. 참신하고 박진감넘치고 다 좋은데 결말이 허무하고, 결말에 다가가는 과정에 힘이 없으며 뭔가 더 끌어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고 얕게 마무리된 이야기같아서 아쉬움. 그리고 이 이야기만큼 극단적이진 않겠지만 요즘 사람들 마음속에 너나 나나 검은 구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덧붙여서 난 요즘 그 구가 열심히 감수분열하고 있는 중이라 더 쫓기는 기분으로 읽음. 차라리 진짜 이런 구가 나타나서 다 리셋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기도 함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까 그건 너무 슬플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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