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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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서효인, 「저글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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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 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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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아이가 강 박사의 딸이구나. 저 아이는 그날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아니면 예쁜 옷 한 벌이라도 새로 해입었을까. 요즘 아이들 옷은 터무니없이 비싸다던데 그걸론 모자라지나 않았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문득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자기 입 근육이 삐었나 보다 싶으면서도 미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감과 숭고한 대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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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비나 조부모 중 누구의 실수인지 아이의 목뒤에 반쯤 떨어지다 만 상표 태그가 삐져나온 것을 못 본 체하며 돌아선다. 그녀는 한 달 전 3번 진료실을 나서며 느꼈던 감각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며, 이 조손을 바라보면서 그때의 감각을 굳이 상기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룬 살점과 핏방울과 뼛조각을 잊고 긴장을 풀린 채 따뜻한 꿈을 꿀 뻔했던 순간을, 소독약과 스킨 섞인 독특한 냄새를, 한 폭 주단과도 같던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마음속에 피어오른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 접속했기 때문에 생겨난 작은 흥분에 불과하며, 거기 몸을 깊이 담그지 못하고 발만 살짝 적셨다가 돌아 나온 데서 비롯한 아쉬움의 반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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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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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지면서 방향을 잃은 핏줄기가 소년의 발과 복도 바닥을 적셔서 순식간에 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하자 피 냄새일 것으로 짐작되는 입자들이 콧속을 타고 간질였는데 이상한 건 지금 눈앞에 아버지의 붉은 버리통이 있으니 이게 피 냄새인가 보다 싶을 뿐 소년이 느끼기에는 피바다에서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비린내나 시취가 아니라 따뜻하고 폭신한 팬케이크에 끼얹어진 메이플 시럽 냄새 같다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머리통이 자기 발을 짓누르고 있음에도 그저 바니타스 정물화처럼 내려다볼 뿐 그 자리에서 돌아 나가 경비실로 기어 내려갈 생각조차 못한 것은 그 모순되는 냄새 때문이었을 텐테, 어떻게 죽음이 이토록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를 풍길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리더십을 함양하는 논리 논술 철학 학웡네서 익혀온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이었기에 소년의 온몸에서 현실감이 각질처럼 떨어져 나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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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가벼운 인사일 뿐이라도,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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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가지, 조각은 일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의뢰인이 스스로 세상을 떠날 것만 같다는 예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정확하게는 그 의뢰인이 한때 갖고 있었던 가족, 그것이 어떤 느낌이며 그것을 불의의 방식으로 잃었을 때 한 사람의 정신이 어느 정도 손상을 입는지, 과육에서 떨어져 나온 사과 껍질 같은 생의 잔여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다. 비록 두꺼운 선글라스 너머에 자리한 슬픔의 심연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동공 대신 지지대를 잃은 반연식물의 정처 없음을 포착한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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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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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 조각은 자리에 일어설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을, 그보다는 좀더 명확한 감정으로 사실은 선뜻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는 자신의 속내를, 이 자리에 앉아서 듣고 싶었던 건 과일의 당토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목소리였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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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감촉으로 봐서 달 줄이야 알았지만 입에 넣으니 주인 여자의 말 이상이다. 혀에 감긴 귤 알맹이가 부서지면서 입안을 달콤하고도 청량한 감각으로 채우고, 세로토닌이 한껏 상승한 상태에서 조모와 손녀를 바라보자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스럽다. 나름의 아픔이 있지만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지바른 곳의 사람들,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날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들을 응시하는 지금이 좋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언감생심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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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비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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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는 둘이 나이 차이도 다섯 살밖에 나지 않으니 조와 언니 동생 먹고 편하게 지내라 했지만 조각은 류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에 방파제를 치기 위해 어디까지나 서어한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고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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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없으면 이제는 내가 불편해. 그러니까 관둬."

그 정색하는 얼굴을 본 순간, 그것이 한 여인을 붙잡음이 아닌 수족 같은 부하나 비서를 묶어두려는 것인 줄 알면서도 조각은 마음 어딘가 파인 도랑에 미온수가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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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깉은 애도. 어떤 구체적인 설명이나 동의도 없이 자연스레 그리된 입맞춤도, 깍지를 낀 서로 다른 두 개의 손도 절망과 슬픔의 진혼 행위. 그래서 이어져 있는 듯하지만 철저하게 하나가 아닌. 다만 이 순간 죽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현재를 견디기 위함인 동시에 눈앞에 살아 있는 사람의 호흡을 확인하는 차원에 머무는 의식. 하여 꿈으로만 그리던 류 옆에 있으면서도 조각은 그와의 밀착에 충분히 반응할 수 없었다. 익지 않은 감정은 진혼과 함께 영원히 봉인되리라는 걸 그녀는 예감했고, 그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류에게 나눠주는 체온으로써 자신의 한 시절을 종결되리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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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만을 고려한다면 정처 없는 여관 생활을 계속하는 편이 나았겠지만 류는 자주 들어오지 않는 집일망정 사람에게는 등 붙이고 머물 곳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류같은 사람이, 그것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가족을 잃고 나서도 집에 대한 기초 신화를 견지한다는 건 의아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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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이랑 겉옷 그대로 있는데, 화장실 간다고 나간 지 오래됐는데, 지금 보니 화장실에 없다고……."

말을 듣는 강 씨의 머리에 피가 몰리고 심장이 난폭하게 뛰기 시작한다. 원인 불명의 이변이 일상을 압도하고 대상 모를 두려움이 구체적인 질감을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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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잠든 무용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깊이 파고들어보다가, 무용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참을 그 자세로 손가락만 대고 있다. 슬며시 흔들어보는 무용의 몸은 무겁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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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해지던 양치식물의 냄새가 사라지고 그녀는 투우의 눈을 감긴 다음, 역시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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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문장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 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나왔다 one of my 최애작가님

책내용은 사실 다 읽고 며칠곱씹어보면 그렇게 특출하게 느껴지진 않는데(안좋다는 말이 아님) 문체랑 표현이 너무나 내 마음에 들어서 늘 와 와 하면서 읽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함. 

이번책은 전보다 모르는 단어가 많았는데, 모르는걸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이상한 강박증덕택에 책을 읽다가 중간중간에 사전을 켜서 단어 뜻을 찾아봤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짜증이 올라오지 않았다. 깊이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이 시대에 제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어스(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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