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경백."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으리라.

 

 

 

 

 

-

심문이 끝났다. 호송차에 오르기 위해 재판소에서 나올 때, 나는 매우 짧은 한순간 여름날 저녁의 냄새와 색깔을 다시 느꼈다. 호송차의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한 도시의 온갖 친숙한 소리들,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던 어떤 시각의 온갖 친숙한 소리들을 마치 내 피로의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양 하나씩 다시 떠올렸다. 이미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대기를 가르는 신문팔이들의 외침소리, 작은 공원의 마지막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들의 호객소리, 시내 급커브길을 도는 전차의 마찰음, 항구에 어둠이 내리기 전에 하늘에 깃드는 아련한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행로, 내가 눈감고도 걸을 수 있었던 행로를 내게 다시 그려주었다. 그렇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던 시각이었다.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언제나 가벼운 잠, 꿈도 없이 가벼운 잠이었다.

 

 

 

 

 

-

대개 이야기를 듣는데 열중했음에도 가꿈 나도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는데, 그때마다 내 변호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잠자코 있어요, 그게 더 낫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를 제외한 채 사건이 다뤄지고 있는 셈이었다. 모든 것이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내 의견의 청취 없이,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귀를 귀울였고, 나를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한 평범한 인간의 장점이 한 죄인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러나 그 모든 장광설들, 내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 그 모든 날들, 그 끝없는 시간들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이 무색의 물, 내가 그 속에서 현기증을 느꼈던 무색의 물처럼 되어버리는 인상을 받았다.

 

결국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내 변호사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아이스크림 장수의 나팔소리가 거리로부터 여러 방과 여러 법정을 거쳐 내 귀에까지 울려 퍼졌다는 사실뿐이다.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삶,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더없이 소박하고 더없이 끈질긴 기쁨을 발견했던 삶에 대한 추억에 사로잡혔다. 이를테면 여름 냄새, 내가 좋아했던 동네, 저녁 하늘, 마리의 웃음과 원피스가 내게 준 기쁨에 대한 추억 말이다.

 

 

 

 

 

-

내가 그에게 그만 가달라고, 나를 혼자 있게 해달라고 말하려 했을 때, 그가 갑자기 나를 향해 돌아서며 폭발하듯 소리쳤다. "아니, 나는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도 다른 하나의 삶을 소망한 적이 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나는 물론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은 부자가 되거나, 헤엄을 아주 잘 치거나, 더 잘생긴 입을 가지기를 소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게 없다고 대답했다. 둘은 동일한 차원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끊었고, 내가 그 다른 하나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자 나는 "내가 현재의 이 삶을 추억할 수 있는 하나의 삶"이라고 소리쳤고, 연이어 이제 그런 이야기에 진력이 난다고 말했다.

 

 

 

 

 

 

-

마지막

 

그가 떠난 후,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했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로 별들이 가득 보였기 때문이다. 전원의 소리가 내 귓전까지 올라왔다. 밤의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적셨다. 이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마치 밀물처럼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그때, 밤의 어둠 저 끝에서 뱃고동이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이제 나는 왜 엄마가 삶이 끝날 무렵에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엄마가 삶을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거기, 거기에서도, 뭇 생명이 꺼져가는 양로원 주위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욕망이 일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로 인해 눈물을 흘릴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내게서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비워준 듯, 신호와 별들이 가득한 밤의 어둠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가슴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그토록 형제 같으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결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일은 처형일 날 모쪼록 많은 구경꾼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를 소망하는 것뿐이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는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의 빈민가로 이사했고, 가정부 일을 하며 두 아들 뤼시엥과 알베르를 키웠다.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웠고 글을 읽을 줄 몰랐기에 늘 침묵 속에서 살았다. 유명 작가인 아들의 글을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던 것은 어머니에게 크나큰 슬픔이었으리라.

 

 

 

 

 

 

 

 

 

 

 

 

-

 

“쓴다는 것, 그것은 최고로 고독한 삶이다.

 

작가는 고독 속에서 작품을 완성하며 그리고 정말 훌륭한 작가라면 날마다 영원성이나 영원성의 부재와 맞서 싸워야만 한다.”

 

- 1954년, 노벨문학상 당선 소감,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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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다시 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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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추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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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구 (김이환)

 

 

 

 

 

-

첫문장

 

"……을 조심하게 젊은이."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남자의 어깨에 부딪히면서 건넨 말이었으나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남자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

그들은 새로운 유희를 찾기 시작했다. 남자는 게임을 발견했고, 청년은 영화를 찾아냈다. 그들은 전자제품 매장에서 게임기와 디브이디 플레이어를 꺼내 가장 좋은 텔레비전과 연결하고 스피커까지 다 세팅한 다음, '세계는 멸망했습니다'라는 파란 화면이 사방에 켜진 그곳에서 게임과 영화로 시간을 보냈다.

 

 

 

 

-

청년이 말했다.

"다 죽어도 싼 놈들이에요."

"너 지금 나한테 맞았다고 그런 말로 화 푸는 거지?"

"다 잘 죽었어요. 동물은 멸종하고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은 더러워지고. 서로 싸우고 죽이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인간이야말로 추한 존재예요. 다 죽었으니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지랄하네. 나는 사람이 너무 그리워. 어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마트로 찾아오는 꿈을 꿨어. 우리처럼 서로 손을 묶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구에게 흡수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서로 손을 묶으면 구에 흡수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여서 같이 삽시다, 그러더라. 그중에 부모님도 있었는데, 내가 부모님에게 막 다가가려는 순간 꿈에서 깼어. 네가 오줌 마렵다고 화장실 가자고 깨워서. 개새끼, 너만 아니었으면 꿈에서 부모님하고 얘기도 좀 해봤을 텐데."

 

 

 

 

-

남자는 세상에 홀로 남았다.

 

 

 

 

-

끝문장

 

그는 길에 도착했다. 그는 길을 뛰었고 더 멀리, 그리고 더 멀리 도망쳤다. 그는 더 먼 곳으로 도망쳤고, 다시 도망쳤다. 끝없이 도주했다. 남자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절망을 피해 도망쳤다. 이것은 남자의 도주에 대한 기록이다. 남자는 도망친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는 죄다 더럽게 진부하고 평면적이며 부수적인 서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책편식이 심한 편이라 요즘 한국 현대소설 위주로 읽고 있는데 대체 언제쯤 입체적이고 통통 튀는 여성 캐릭터를 만날 수 있을까. 그것도 주인공이면 좋으련만 

 

아 이야기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흡입력이 어마어마한 소설이다. 보통 며칠에 걸쳐 쉬엄쉬엄 읽는 독서습관을 가진 내가 몇시간만에 다 읽어버렸으니까. 참신하고 박진감넘치고 다 좋은데 결말이 허무하고, 결말에 다가가는 과정에 힘이 없으며 뭔가 더 끌어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고 얕게 마무리된 이야기같아서 아쉬움. 그리고 이 이야기만큼 극단적이진 않겠지만 요즘 사람들 마음속에 너나 나나 검은 구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덧붙여서 난 요즘 그 구가 열심히 감수분열하고 있는 중이라 더 쫓기는 기분으로 읽음. 차라리 진짜 이런 구가 나타나서 다 리셋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기도 함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까 그건 너무 슬플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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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서효인, 「저글링」에서

 

 

 

 

-

첫문장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 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

아, 저 아이가 강 박사의 딸이구나. 저 아이는 그날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아니면 예쁜 옷 한 벌이라도 새로 해입었을까. 요즘 아이들 옷은 터무니없이 비싸다던데 그걸론 모자라지나 않았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문득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자기 입 근육이 삐었나 보다 싶으면서도 미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감과 숭고한 대상화.

 

 

 

 

-

그녀는 아비나 조부모 중 누구의 실수인지 아이의 목뒤에 반쯤 떨어지다 만 상표 태그가 삐져나온 것을 못 본 체하며 돌아선다. 그녀는 한 달 전 3번 진료실을 나서며 느꼈던 감각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며, 이 조손을 바라보면서 그때의 감각을 굳이 상기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룬 살점과 핏방울과 뼛조각을 잊고 긴장을 풀린 채 따뜻한 꿈을 꿀 뻔했던 순간을, 소독약과 스킨 섞인 독특한 냄새를, 한 폭 주단과도 같던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마음속에 피어오른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 접속했기 때문에 생겨난 작은 흥분에 불과하며, 거기 몸을 깊이 담그지 못하고 발만 살짝 적셨다가 돌아 나온 데서 비롯한 아쉬움의 반영일 뿐이다.

 

 

 

 

-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이.

 

 

 

 

-

쓰러지면서 방향을 잃은 핏줄기가 소년의 발과 복도 바닥을 적셔서 순식간에 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하자 피 냄새일 것으로 짐작되는 입자들이 콧속을 타고 간질였는데 이상한 건 지금 눈앞에 아버지의 붉은 버리통이 있으니 이게 피 냄새인가 보다 싶을 뿐 소년이 느끼기에는 피바다에서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비린내나 시취가 아니라 따뜻하고 폭신한 팬케이크에 끼얹어진 메이플 시럽 냄새 같다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머리통이 자기 발을 짓누르고 있음에도 그저 바니타스 정물화처럼 내려다볼 뿐 그 자리에서 돌아 나가 경비실로 기어 내려갈 생각조차 못한 것은 그 모순되는 냄새 때문이었을 텐테, 어떻게 죽음이 이토록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를 풍길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리더십을 함양하는 논리 논술 철학 학웡네서 익혀온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이었기에 소년의 온몸에서 현실감이 각질처럼 떨어져 나간 거였다.

 

 

 

 

-

무언가를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가벼운 인사일 뿐이라도,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

단 한 가지, 조각은 일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의뢰인이 스스로 세상을 떠날 것만 같다는 예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정확하게는 그 의뢰인이 한때 갖고 있었던 가족, 그것이 어떤 느낌이며 그것을 불의의 방식으로 잃었을 때 한 사람의 정신이 어느 정도 손상을 입는지, 과육에서 떨어져 나온 사과 껍질 같은 생의 잔여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다. 비록 두꺼운 선글라스 너머에 자리한 슬픔의 심연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동공 대신 지지대를 잃은 반연식물의 정처 없음을 포착한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

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

그러는 동안 조각은 자리에 일어설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을, 그보다는 좀더 명확한 감정으로 사실은 선뜻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는 자신의 속내를, 이 자리에 앉아서 듣고 싶었던 건 과일의 당토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목소리였음을 깨닫는다.

 

 

 

 

-

말랑말랑한 감촉으로 봐서 달 줄이야 알았지만 입에 넣으니 주인 여자의 말 이상이다. 혀에 감긴 귤 알맹이가 부서지면서 입안을 달콤하고도 청량한 감각으로 채우고, 세로토닌이 한껏 상승한 상태에서 조모와 손녀를 바라보자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스럽다. 나름의 아픔이 있지만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지바른 곳의 사람들,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날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들을 응시하는 지금이 좋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언감생심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

 

 

 

 

-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비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

류는 둘이 나이 차이도 다섯 살밖에 나지 않으니 조와 언니 동생 먹고 편하게 지내라 했지만 조각은 류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에 방파제를 치기 위해 어디까지나 서어한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고수하고 있었다.

 

 

 

 

 

-

"네가 없으면 이제는 내가 불편해. 그러니까 관둬."

그 정색하는 얼굴을 본 순간, 그것이 한 여인을 붙잡음이 아닌 수족 같은 부하나 비서를 묶어두려는 것인 줄 알면서도 조각은 마음 어딘가 파인 도랑에 미온수가 고였다.

 

 

 

 

 

 

-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깉은 애도. 어떤 구체적인 설명이나 동의도 없이 자연스레 그리된 입맞춤도, 깍지를 낀 서로 다른 두 개의 손도 절망과 슬픔의 진혼 행위. 그래서 이어져 있는 듯하지만 철저하게 하나가 아닌. 다만 이 순간 죽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현재를 견디기 위함인 동시에 눈앞에 살아 있는 사람의 호흡을 확인하는 차원에 머무는 의식. 하여 꿈으로만 그리던 류 옆에 있으면서도 조각은 그와의 밀착에 충분히 반응할 수 없었다. 익지 않은 감정은 진혼과 함께 영원히 봉인되리라는 걸 그녀는 예감했고, 그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류에게 나눠주는 체온으로써 자신의 한 시절을 종결되리라는 걸 알았다.

 

 

 

 

-

안전만을 고려한다면 정처 없는 여관 생활을 계속하는 편이 나았겠지만 류는 자주 들어오지 않는 집일망정 사람에게는 등 붙이고 머물 곳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류같은 사람이, 그것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가족을 잃고 나서도 집에 대한 기초 신화를 견지한다는 건 의아한 일이었다.

 

 

 

 

-

"가방이랑 겉옷 그대로 있는데, 화장실 간다고 나간 지 오래됐는데, 지금 보니 화장실에 없다고……."

말을 듣는 강 씨의 머리에 피가 몰리고 심장이 난폭하게 뛰기 시작한다. 원인 불명의 이변이 일상을 압도하고 대상 모를 두려움이 구체적인 질감을 갖춘다.

 

 

 

 

 

-

그녀는 잠든 무용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깊이 파고들어보다가, 무용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참을 그 자세로 손가락만 대고 있다. 슬며시 흔들어보는 무용의 몸은 무겁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

희미해지던 양치식물의 냄새가 사라지고 그녀는 투우의 눈을 감긴 다음, 역시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

끝문장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 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나왔다 one of my 최애작가님

책내용은 사실 다 읽고 며칠곱씹어보면 그렇게 특출하게 느껴지진 않는데(안좋다는 말이 아님) 문체랑 표현이 너무나 내 마음에 들어서 늘 와 와 하면서 읽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함. 

이번책은 전보다 모르는 단어가 많았는데, 모르는걸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이상한 강박증덕택에 책을 읽다가 중간중간에 사전을 켜서 단어 뜻을 찾아봤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짜증이 올라오지 않았다. 깊이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이 시대에 제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어스(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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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시간 -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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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
그의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여자는 묵묵히 올려다본다. 첫 시간에 그것을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古지도 같다고 생각했다.

 

 

 

 

 

-
밤은 고요하지 않다.
반 블록 너머에서 들리는 고속도로의 굉음이 여자의 고막에 수천개의 스케이트 날 같은 칼금을 긋는다.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
오늘 아침, 이 얇은 초록색 책이 다시 생각나 창고의 트렁크에서 꺼내왔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다가 거친 필체의 메모를 발견했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라고 보르헤스가 구술한 문장 바로 아래였다.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이어서 독일어로 생명, 생명이라고 흘려썼다가 굵게 가로로 선을 그어 지운 흔적이 보였다.
분명히 내 필체인데, 언제 그것을 적어넣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독일에서 학생들이 노트 필기할 때 사용하는 짙은 청색 잉크 글씨라는 것만 알아볼 수 있었다.

 

 

 

 

 

-
볼 때마다 다른 색깔의 화려한 사리를 쓰고 있던 당신의 벵골인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답습니까. 차디찬 회색 눈으로 내 안구를 들여다보던 늙은 독일인 아버지는 아직 안과의사입니까. 당신이 낳았다는 딸은 이제 많이 자랐습니까. 이 편지를 읽는 지금, 당신은 아이를 외조부모에게 보이려고 잠시 다니러 온 참입니까. 당신이 쓰던 북쪽 방에 머물면서, 이따금 유모차를 밀고 나가 강가를 산책합니까. 당신이 좋아했던 오래된 다리 앞의 벤치에 앉아 쉬며, 늘 호주머니에 담고 다니던 필름조각들을 꺼내 눈에 대고 태양을 올려다봅니까.

 

 

 

 

 

-
나는 침묵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던 당신은 수첩을 덮어 도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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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희랍식 논증의 방식으로 이따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게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

......당장, 나가!
그 목소리.
겨울 밤 창문 틈을 할퀴며 들어오는 바람 소리. 실톱이 쇠 위에서 소리치고 유리창이 갈라지는 소리. 당신의 목소리.
나는 더듬더듬 배로 기어가 다시 당신의 다리를 안았습니다. 정말 몰랐습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기로 당신이 나무토막을 집어 내 얼굴을 쳤을 때, 내가 즉시 기절했을 때, 델 것 같은 눈물이 내 눈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을 당신은 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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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

방금 목욕시키고 침대에 함께 누운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사과 냄새 같은 거품비누 향이 났다. 아이의 동그란 눈 속에 그녀의 얼굴이 비쳐 있는 것이 보였다. 비쳐 있는 그녀의 눈 속에 다시 아이의 얼굴이 비치고, 그 얼굴 속 아이의 눈에는 또다시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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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은 고백해도 괜찮을까.
네가 연습하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나는 투덜거리곤 했지만, 너는 다혈질의 성격대로, 오랜 시간 훈련받은 성량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밀어붙이곤 했지만, 아마 넌 짐작 못 했을 거야. 서울보다 추웠던 푸랑크푸르트에서 맞은 독일의 첫 겨울, 낯선 교실과 언어와 사람들에 지쳐 돌아온 내가, 아파트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네 노래를 들으며 벽에 기대 앉아 있곤 했다는 걸. 그 목소리가 어떻게 내 얼굴을 만져주었는지.

 

 

 

 

 

-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같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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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마 짐작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따금 나는 당신과 긴 대화를 나누는 상상을 했는데.
내가 말을 건네면 당신이 귀 기울여 듣고, 당신이 말을 건네면 내가 귀 기울여 듣는 상상을 했는데.
텅 빈 강의실에서 희랍어 수업의 시작을 기다리며 함께 있을 때, 그렇게 실제로 당신과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당신은 절반, 아니 삼분지 이쯤, 아니, 그보다 더 부서져버린 사람처럼, 무엇인가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벙어리 사물처럼, 무슨 잔해처럼 거기 있었는데. 그런 당신이 무서워지기도 했는데. 그 무서움을 이기고 당신에게 다가가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았을 때, 당신도 문득 몸을 일으켜 꼭 그만큼 다가와 앉을 것 같기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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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끝문장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너무 좋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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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2006)

 

 

 

 

-

첫문장

 

벌판의 중심에는 탁구대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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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많이 맞았다. 특별히, 많이 맞는 날이 있다. 한달에 두세 번은, 꼭 그렇다. 어쩔 수 없다. 간단히 넘어가려 해도 이유가 내게 있는 게 아니니까. 끼익. 다시 쇳소리가 났다. 녹이 슨 소파의 스프링은, 그 자체로 천식을 앓는 노파의 기관지 같다. 기침이나 골골거리게, 나도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 확 늙어버리면, 따 같은 건 당할 일도 없겠지. 아니 마흔살만 되어도, 서른살, 아니 스무살만 되어도 좋아지겠지. 스무살. 스무,살. 스무살까지, 그런데 살아 있기나 할까? 제발, 살았으면 좋겠다. 높고, 원대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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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에어컨 좀 끕시다,라고 소리치는 것은, 그래서 날 좀 따돌리지 말라니까, 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모쪼록 그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반팔 아래의 삼두박근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 나는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다수의 결정이다. 참고, 따라야 한다. 에취. 뒤에서 누군가 심한 재채기를 했지만, 이내 버스 속은 잠잠해졌다.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

그건 그렇고, 편의점의 사장과는 친척이니? 뒤집힌 우산을 다시 뒤집으며 내가 물었다. 아니, 같은 클럽의 회원이야.

 

 

클럽이라니!

 

 

사실 무척이나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클럽, 게다가 그런 어엿한 성인과 친분을 나누는 클럽이라니. 순간 모아이가 명왕성 정도로 멀게 느껴졌지만, 나는 역시 내색하지 않았다. 어떤…클럽인데? 말해도 될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핼리혜성? 응. 그럼 뭐 소원 같은 걸 비는 건가? 그런 건 아니고, 쉽게 말하자면 핼리가 와서 지구와 충돌해주길 기다리는 사람들이야.

 

 

 

 

 

-
디디티가 검출된 에스키모와 펭귄 이야기 아니? 디디티? 뭐, 아황산가스와 비슷한 거라 여기면 돼. 그러니까 미국의 클리어랜드란 곳에 모기를 없애려 뿌린 디디티가 생체농축과 먹이연쇄를 통해 극지까지 갔던 거야. 대단하지 않냐? 대단한데. 즉 에스키모처럼 동떨어진 인간에게도 인류의 결과가 집약될 수 있다는 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실은 그래서 인류의 모든 걸 지녔다고 말할 수 있지. 디디티를 살포하던 인간이 그 결과를 알았을까? 에스키모는, 자신이 지닌 결과의 원인을 알았을까? 즉 인간이란 누구나 인류의 원인이자 결과란 얘기지. 그리고 서로를 모르는 거야. 말이 돼?

 

 

 

 

 

-
혹시 핼리혜성이 온다는 뉴스는 없었나요?


 

 

 

 

-

나 참… 아무튼 얘야.

혜성 같은 건 오지 않는단다.

 

 

 

 

 

-
순간 달의 뒷면이라 여겨도 좋을 만큼 주위가 고요해졌다.

 

 

 

 

 

-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

분명 달라졌다면

 

달라졌다 말할 수 있는 방학의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치수가 그렇게 사라졌으므로, 안짱다리의 달과 함께-어디서 슬림을 빨건 국수를 빼건, 그렇게 사라져주었으므로. 그러나 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방학이었다. 세계는 연둣빛 박을 발견한다 해서, 또 키위와 블루베리를 마신다 해서 달라지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래서 그사이 또다른 일이 있었고 - 어떤 이유가 있겠지, 나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며 세계를 체념케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는 과연 듀스스코어, 좋은 일은 연거푸 일어나지 않는다.

 

 

 

 

 

-
건조하고 뜨거운 오후의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나는 남은 키위를 들이켰다.

 

 

핼리는 오지 않는대.

 

 

그럴 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모아이는 쉽게 수긍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우리는 기대를 거는 거야. 핼리를 기다리는 건, 말하자면 삶의 자세와 같은 거지. 그건 몸을 숙여 저편의 써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야. 나는 탁구를 모르니까 어떤 공도 받지 않겠다, 공 같은 건 오지도 마라 - 그건 인류가 취할 예의가 아니라고 봐. 마치 우리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혜성 같은 건 오지도 마라 - 그게 아니고 또 뭐냐는 거지. 그래서 우린 매달 한번씩 핼리가 오는 날을 정하고 기다리는 거야.

 

 

긴장된 삶이로구나.


겸손한 삶이지.

 

 

 

 

 

-
몰라, 방학 때 탁구 배웠댄다. 묻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힐끗 돌아볼 정도의 목소리로 안경잡이가 얘기했다. 킥킥킥킥 하는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조례가 끝나자 다수의 아이들이 안경잡이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장난을 치며 아이들은 교실을 향했다. 텅 비어가는 운동장의 한편에서 나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따. 가을이 시작된 하늘은 허무할 정도로 높고, 깊고, 비어 있었다. 우주의 대부분은 빈 공간, 인간과 인간의 사이도 대부분은 빈 공간이야. 결국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 은하와 은하 사이처럼 멀고도 아득했다.

 

 

 

 

 

-
끝문장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벌판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모아이에게 나는 손을 흔들었고,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발길을 돌렸다. 핑퐁, 경쾌한 소리가 마음을 울릴 만큼 숲의 공기는 상쾌했다. 천천히

 

 

나는 학교를 향해 걸었다.

 

 

 

 

 

+
작가의말 중에서


실은, 인류는 애당초 생존한 게 아니라 잔존해왔다. 만약 인류가 생존한 것이라면 60억 중 누구 하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대체, 왜,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말하자면 이곳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잔존해왔다.

 

 

정신이 결코 힘을 이길 수 없는 이곳에서
희생하는 인간이
이기적인 인간을 절대 당해낼 수 없는 이곳에서

 

 

이곳은 어디일까. 남아 있는 우리는
뭘까?

 

 

 

 

 

 

 

 

한줄평 : 뭐 이런 책이 다있어 (나쁜뜻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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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by 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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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2004년 9월 12일 새벽은 내가 아버지 편에 서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다. 아버지가 체포됐다는 사실도, 어머니의 죽음도,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막연하고도 어렴풋한 불안을 느꼈을 뿐이다. 아저씨의 손을 잡고 두 시간여 숨어 있던 세령목장 축사를 나선 후에야,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왔다.

 

 

 

 

-

우리는 떠돌이가 됐고 주거지는 대개 항구도시였다. 아저씨는 내게 본격적으로 다이빙을 가르쳤다. 바다는 내게 자유를 주었다. 해저의 어둠 속에 가만히 몸을 옹크리면 세상이 한숨에 사라졌다. 그곳은 누구의 손도 닿지 않고, 누구의 눈길도 미치지 않고,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상의 절대벽이었다.

 

 

 

 

-

"사고야."
아저씨는 비키니옷장에서 내복과 드라이슈트(동계용 잠수복)를 꺼냈다.
"셋은 찾았는데, 카메라를 든 아이가 없다는 거야."
'그런데 아저씨가 왜 가요?'라고 묻고 싶었다. 잠수장비를 감춰버리고 싶었다. 아저씨가 아무 일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뭔가를 한다'는 '뭔가를 잃는다'와 같은 말이었다. 가까스로 얻은 것, 불안하게 지켜온 것, 막 꾸기 시작한 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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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멀리 평야와 하늘이 맞닿은 곳을 가리켰다. 저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 '득량만'이라는 바다가 있다고 했다. 남풍이 올라오는 밤에, 창문을 열고 숨을 마셔보라고 했다. 바다냄새가 내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나는 밤마다 창을 열고 남풍을 기다렸다. 밤마다 내 안으로 들어온 건 그 아이의 목소리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의 눈에 반달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애정과 믿음이 담긴 눈웃음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초라한 삶을 견디게 하는 달빛이었다.

 

 

 

 

-

차는 한 방에 끌려 올라왔으나 적절한 순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끌려 올라온 여파로 반원을 그리며 미끄러지던 차는 길가에 서 있던 은주를 덮쳤다. 한순간, 은주는 현실감을 잃었다. 꼼짝하지 않고 서서 남편이 자신과 차 사이로 끼어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멈췄을 때, 남편은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남편은 허벅지 근육파열로 그해 스프링 캠프에 합류하지 못했다. 다리로 차를 세운 대가치고는 가벼운 상처였으나 1군 발탁을 약속받은 2군 선수에겐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보상으로 그는 아내를 지키고 아들을 얻었다. 부자가 첫 대면하던 장면은 아직도 그녀에게 강건하고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변기뚜껑 같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이의 손가락 끝을 건드리던 남편의 모습이, 행복과 두려움과 불안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중얼대던 그의 혼잣말이. "내 아들……"

 

 

 

 

-

"서원이가 어떻게 자랐는지 상상하는 게 가장 즐거워. 그 아이 생일마다 승환 씨가 보내준 사진을 벽에 쭉 붙여놨거든. 보면 볼수록 신기해. 열다섯 살까지 소년이다가 열여섯 살에서 청년으로 훌쩍 뛰어오르는거. 내내 아이 곁에 있었따면 난 아마 그 마술 같은 점프를 못 봤을 거야. 지금도 생생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그 아이 모습이. 강당에 모인 아이들 수백 명 중에서 우리 서원이만큼 품위 있는 아이는 없었어. 내가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는지, 훗날 그 아이가 남자가 되면 꼭 얘기해주겠다고……"
정신없이 파일을 껐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잊으려 안간 힘을 써온 목소리였다. 정말로 잊은 목소리였나 보았다. 한참을 듣고서야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휴대전화 속에서 "서원아"하고 부르던 음성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였으니까.
노트북도 껐다. 다시는 그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소설도 읽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저지른 짓을 확인하는 게 너무나 괴로워서, 라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나를 괴롭힌 건 아버지 그 자체였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거인이 아니었다. 어리석고 나약한 겁쟁이었다. 그 왜소하고 볼품없는 남자와 대면하는 게 싫었다. 최현수라는 사내의 초라한 인생에 숨이 막혔다. 그러나 파일을 닫아도, 노트북을 꺼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끌 수가 없었다.

 

 

 

 

-

"고생했어, 우리 서원이, 잘 견뎠어."
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정상적으로 보여야 할 반응이 없었다. 울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최소한 흐느끼기라도 해야 했다. 뒤늦은 쇼크가 온 것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침묵했다. 승환은 갑갑했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 터트려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서원은 홀로 견딘 공포와 고통을 영원히 끌어안게 될지도 몰랐다. 세령호는 서원의 우물이 될 터였다. 제 아빠의 것보다 더 어둡고, 싶고, 힘센 우물.

 

 

 

 

-

"... 실은, 며칠 전에 여기 있는 사형수들 모두 건강검진을 받았네. 풍문으로 듣자하니 석 달 후라더군. 정말로 집행된다면 나일 거라고 생각하네. 나였으면 좋겠네. 서원이? 우리 서원이…… 작별인사를 할 수 있다면…… 자네가 간직했다 전해주겠나. 이가 없어서 잘 될지 모르겠네만."
아버지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보귀대령의 행진곡이었다. 나는 책상에 이마를 대고 엎으렸다. 양팔 사이에 귀를 묻고, 질끈 눈을 감고, 휘파람이 끌고 온 것들을 모질게 밀쳐냈다. 아버지와 나, 꿈결 속 삽화 같은 우리의 추억.

 

 

 

 

-

저는 내일 프랑스를 떠날 예정입니다. 이번엔 체류연장을 위한 짧은 여행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여전히 두렵지만 해볼 참입니다. 등짝에 붙은 그림자를 없애고 나면 제게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습니다. 어디로 갈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곳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햇살이 맑은 날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마당에 내려가 볼 참입니다. 일광욕 의자에 널어둔 이불도 걷을 겸, 결혼식 피로연에 쓸 파이를 잔뜩 굽게 해주었던 사과나무를 마지막으로 돌아볼 겸해서요.
11월 1일, 문하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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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문장


0시. 심연에 닿았다. 시야는 어두웠고 사물은 무채색을 띠었다. 잿빛 고기 떼는 머구름처럼 머리 위를 가렸다. 나는 철어렁이에서 유골상자를 꺼냈다. 종아리에 찬 나이프로 상자를 봉한 고무줄을 끊고 뚜껑을 열었다. 하얀 포말이 고기 떼 사이로 뭉클, 피어올랐다가 조류를 타고 흩어져갔다. 마치 눈보라가 날리는 듯한 형상이었다.
44년 전 오늘, 남자가 태어나던 날에도 눈이 내렸다고 했다. 13년 전 오늘도 눈이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남자의 어깨와 세상이 모두 부서진 그해 겨울, 세 번째 어깨수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서른한 번째 생일에, 환자복 위에 파카를 걸치고 간호사 몰래 병원을 빠져나온 오후에, 남자는 여섯 살 난 아들과 놀이공원에 갔다. 동물원은 문을 닫았고, 사파리 기차는 플랫폼에 정차해 있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는 아들에게 얼음이 든 자판기 콜라를 뽑아주었고, 그때 하늘은 사막처럼 노랬고, 납빛 구름 아래로 눈바람이 불었고, 가로수들은 비올라처럼 울었고, 아들은 노천 게임기에서 뽑은 웃는 해골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해골을 받아 쥐고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황량한 광장에는 남자가 부는 보귀대령의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아들은 팔을 크게 흔들며 남자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다. 빠밤, 빠바바 빱빱빱. 빠밤……

 

그날처럼, 웃는 해골을 내밀던 여섯 살 오후처럼, 나는 아버지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다.
"해피 버스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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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by 에밀리 브론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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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1801년. 방금 주인 양반 댁에 다녀왔다. 이제 그는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유일한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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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는 아씨였으니까 나랑은 대우가 달랐지. 하녀가 더운 물 대야를 가지고 들어와 발을 씻겨주었고, 린턴씨는 니거스를 만들어 주었고, 이사벨라는 쿠키 한 접시를 몽땅 캐서린 무릎에 쏟아주었고, 에드거는 멀찍이서 입을 헤벌리고 서 있었어. 나중에는 캐서린의 예쁜 머리카락을 말리고 빗질해주었고, 캐서린에게 큼지막한 슬리퍼를 내주었고, 캐서린을 의자째 밀어서 벽난로 앞으로 데려가주었어. 나는 거기까지 보고 들어왔어. 캐서린은 잔뜩 신이 나서 자기 먹을 것을 작은 개랑 스컬커한테 나누어주었고, 스컬커가 받아먹으니까 코를 살짝 꼬집었어. 그 집 아이들의 흐리멍덩한 퍼런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지. 캐서린의 아름다운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비쳤을 테니까. 보아하니 둘 다 캐서린을 보고 홀딱 반했더라. 캐서린은 그런 애들 따위와는, 이 세상 사람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잖아, 그치, 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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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에 대한 주인의 학대는 성자라도 악마로 둔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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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 양은 한번 애정을 품으면 놀라울 정도로 오래 간직했습니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마저 한결같았어요. 린턴 청년은 히스클리프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였지만, 히스클리프만큼 캐시 양의 마음을 차지하기는 어려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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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 당시 히스클리프는 어려서 받았던 교육의 효력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옛날에 있었던 앎에 대한 호기심도 모두 사라지고, 책에 대한 애정이나 배움에 대한 욕구도 완전히 없어져버렸지요. 어렸을 적에는 언쇼 씨의 편애를 받으며 우월감을 키우기도 했었지만, 그런 것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캐서린과 같은 수준으로 공부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썼지만, 결국은 쓰라린 회환을 속으로 삭이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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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부터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 대한 애정을 말로 표현하는 일이 없어졌고, 캐서린이 천진난만하게 입을 맞추거나 끌어안으려고 하면 믿지 못하겠다는 듯 화를 내며 몸을 내뺐습니다. 자기에게 그렇게 애정을 쏟아부어봤자 상대에게 득이 될 게 없음을 의식하는 모양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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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쯤 침묵이 흐른 뒤 캐서린이 말했습니다. "이사벨라 린턴하고 에드거 린턴이 오늘 오후에 오겠다고 했는데, 비가 내리니까 아마 안 올 거야. 하지만 올 수도 있는데, 혹시라도 오게 되면 너만 괜치 야단 맞을 수도 있어."
"엘렌을 보내서 바쁘다고 전해, 캐시." 히스클리프는 계속 우겼습니다. "나를 쫓아내고 그런 한심하고 바보 같은 애들이랑 놀겠다는 거니? 그 애들을 보면 가끔 내가 정말…… 아니다, 관두자."
" 그 애들을 보면 뭐?" 캐서린은 괴로운 얼굴로 히스클리프를 빤히 쳐다보며 소리쳤습니다. 그러고는 머리를 빗겨주는 제게 신경질을 내며 갑자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넬리! 이렇게 빗으니까 컬이 풀렸잖아! 이제 됐어. 그냥 놔둬. 히스클리프, 그 애들을 보면 뭐가 어떻다는 거니?"
"아무것도 아냐…… 저기 벽에 달력 한번 봐." 히스클리프는 창문 옆에 걸린 달력 액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는 저녁에 네가 그 집 애들이랑 있었던 날이고 점은 나랑 있었던 날이야. 보이니? 내가 매일매일 표시했어."
"그래, 잘 보인다. 바보짓을 하는구나. 내가 저런 데 신경 쓸 것 같니?" 캐서린은 쌀쌀맞게 대꾸했습니다. "저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니?"
"나는 신경 써. 나한테는 의미 있어." 히스클리프가 말했습니다.
"그럼 나는 매일 저녁 너랑 있어냐 하니?" 캐서린은 점점 짜증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득이 있어? 네가 무슨 말을 할 줄 아니? 하는 말은 벙어리나 다름없고 하는 짓은 어린애 같은데, 내가 뭐가 재밌겠니?"
"전에는 나한테 그렇게 말한 적 없잖아, 캐시! 내가 말이 없어서 싫다고 말한 적 없잖아! 나랑 같이 있는 게 싫다고 말한 적 없잖아!" 히스클리프는 완전히 흥분해서 고함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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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감정을 표현할 시간이 더는 주어지지 않았어요. 포석 위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거든요. 린턴 청년은 문을 살짝 두드린 후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뜻밖의 호출로 희색이 만면한 얼굴이더군요.
한 친구가 들어오고 한 친구가 나가는 그 순간, 캐서린은 두 친구의 차이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험준한 탄광촌을 보다가 초목이 무성한 아름다운 골짜기를 보는 것과 비슷했겠지요. 생김새뿐 아니라 목소리와 인사말도 정반대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나직했으며, 말투는 록우드 씨에 가까웠어요. 여기 사람들처럼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말투였지요.

 

 

 

 

-

"히스클리프는 어디 갔어?" 캐서린이 노래를 끊으며 묻더군요.
"일하러 마구간에요." 저의 대답이었지요.
히스클리프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깜빡 졸았겠지요.
그리고 다시 한참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사이에 캐서린의 눈물 몇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저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못되게 굴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이러나? 이러는 건 처음인데. 하지만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캐서린은 자기 일이 아닌 다음에는 무슨 일이 됐든 크게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아아, 어떡하지!" 한참 만에 캐서린이 소리쳤습니다. "나 너무 비참해!"
"안됐네요." 제가 대꾸했습니다. "위해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고생하는 일이 얼마나 있다고, 만족할 줄도 모르고!"
"넬리, 비밀 지킬 거지?" 캐서린은 하던 말을 계속 했습니다. 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캐서린의 귀여운 표정은 화를 내야 하는 이유가 너무나 충분할 때조차 화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답니다.
"꼭 지켜야 해요?" 저는 좀 덜 심통 맞게 물었지요.
"당연하지. 나 그것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말을 안 하고는 못 참겠어.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고. 오늘 에드거 린턴이 나한테 청혼했어. 나는 답을 했고, 승낙했는지 거절했는지는 좀 이따가 말해줄 테니까, 넬리, 네가 먼저 말해. 내가 승낙했어야 해, 거절했어야 해?"


...


"우선 먼저, 당신은 에드거씨를 사랑합니까?"
"누군들 아니겠어? 당연히 사랑하지." 캐서린은 대답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캐서린을 상대로 사랑의 교리문답을 진행했습니다. 스물두 살짜리 여자애로서는 그런데로 지각 있는 진행이었지요.
"왜 그 남자를 사랑합니까, 캐시 양?"
"무슨 말이 그래? 사랑하면 그만이지."
"천만에요. 왜 사랑하는지 이유를 말해야 합니다."
"글쎄, 잘 생겼으니까. 그리고 같이 있으면 좋으니까."
"틀렸어요."라는 것이 제 평가였습니다.
"그럼, 젊으니까. 그리고 성격이 밝으니까."
"또 틀렸어요."
"그럼, 나를 사랑하니까."
"그나마 낫네요."
"그리고 또 부잣집이니까. 인근에서 가장 지체 높은 여자가 되면 좋을 테니까. 그런 남편이랑 살면 자릉스럽고 좋을 테니까."
"제일 틀렸어요! 그럼 이제, 캐시 양은 그 남자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사랑할 때…… 바보 같다, 그만하자."
"바보 같다니요. 대답을 하세요."
"그 남자가 밟고 있는 땅, 그 남자가 이고 있는 아늘, 그 남자의 손이 닿는 모든 것,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사랑합니다. 그 남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모든 표정, 그 남자가 하는 모든 행동을 사랑하고 그 남자의 전부를 모두 다 사랑합니다. 이제 됐지?"
"왜 그렇게 사랑합니까?"
"됐어. 장난이었구나! 얄미워죽겠어! 나는 장난 아니란 말이야!" 아씨는 이렇게 말하며 못마빵한 표정으로 벽난로 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나도 장난 아니에요, 캐서린양." 제가 대꾸했습니다. "캐서린 양이 에드거 씨를 사랑하는 이유는 잘생겼고, 젊고, 성격이 밝고, 돈이 많고, 캐서린 양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요. 하지만 마지막 이유는 의미가 없어요. 그 남자가 캐서린 양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도 캐서린 양은 그 남자를 사랑했을 테고, 앞에 나온 네 가지 이유가 없었다면 그 남자가 캐서린 양을 사랑했다 해도 캐서린 양은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


"그렇다면, 해결되었네요. 그냥 지금 좋으니, 린턴 씨랑 결혼하면 되겠네요."
"되는지 안 되는지 말하라는 게 아니야. 결혼은 하기로 정했어. 내가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그걸 말하라는 거야."
"정말 잘했네요. 현재만을 위해 결혼하는 것이 잘하는 짓이라면 말이에요. 그럼 이제 뭐가 그리 비참한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캐서린 양 오빠는 좋아할 테고…… 에드거 씨 부모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 같고, 캐서린 양은 어수선하고 을씨년스러운 집에서 벗어나 부유하고 지체 높은 집에서 살게 될 것이고, 아가씨는 에드거 씨를 사랑하고 에드거 씨는 아가씨를 사랑하고요.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이는데, 대체 뭐가 문제예요?"
"여기! 또 여기!" 캐서린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한 손으로는 자신의 이마를, 한 손으로는 자신의 가슴을 쳤습니다. "영혼이 있는 데서, 영혼인지 심장인지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어!"
"도대체 모를 소리를 하네! 나는 못 알아듣겠어요."
"내가 말한다는 비밀이 그거야. 비웃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말할게. 정확하게 옮기지는 못하겠어. 하지만 내 말을 들으면 너도 내가 어떤 심정인지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거야.
캐서린은 다시 내 옆에 앉았습니다. 점점 슬프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고, 모아 쥔 두 손을 바들바들 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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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리, 나는 천국에서 살면 너무 불행할 거 같아."
"어울리지 않는 곳에 살면 불행할 거예요." 제가 대꾸했습니다. "죄인들은 천국에서 살면 불행할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전에 한번, 천국에서 사는 꿈을 꾸었거든."
"꿈 이야기 하지 말라고요, 캐서린 양! 나는 자러 갈 거예요." 제가 다시 말을 끊었지요.
제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캐서린은 깔깔 웃으면서 저를 붙잡아 앉혔습니다.
"이건 괜찮은 거야." 캐서린은 소리쳤습니다. "천국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더라, 그냥 그 말이야. 나는 세상으로 돌려보내 달라면서 정말로 서럽게 울었어. 천사들이 화가 나서 나를 집어 던졌는데, 떨어진 자리가 폭풍의 언덕 꼭대기의 히스 밭이었어. 나는 너무 행복해서 엉엉 울다 잠이 깼어. 다른 꿈 이야기를 안해도, 이제 내 비밀이 뭔지 알았겠지. 나는 천국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에드거 린턴과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이야. 저 안에 있는 고약한 인간이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결혼 같은 것은 생각조차 안 했을걸. 지금 같아서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도 천해지는거야. 그러니까 내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 돼. 넬리,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 린턴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과 다른 것은 달빛이 번개와 다르고, 서리가 불꽃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일걸."
이 일장 연설이 끝나기에 앞서, 저는 히스클리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뭔가 약간 움직이는 것 같아서 돌아보았더니, 장의자에 앉아 있던 히스클리프가 슬며시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자기도 천해지는 거라는 대목까지 듣고 그냥 나가버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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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턴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 밥상이나 차려. 다 차리면 나랑 같이 먹자. 나는 내 불편한 양심을 속이고서라도 히스클리프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고 싶어.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사랑하다는 게 뭔지 모르겠지?"
"아가씨가 아는 것을 그 애라고 왜 몰라요?" 제가 받아 쳤습니다. "그 애가 사랑하는 게 아가씨라면, 이 세상에 그렇게 불행한 인간도 없을걸요. 캐서린 양이 린턴 부인이 되는 순간, 그 애는 친구도 잃고, 사랑도 잃고, 모든 것을 잃을 텐데! 아가씨는 그 애하고 헤어지고 어떻게 견딜지, 그 애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아 어떻게 견딜지, 그런 생각 해봤어요? 그러니까, 캐서린 양."
"그 애는 혼자 남지 않아!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 캐서린은 분개한 말투로 소리쳤습니다. "나랑 그 애를 떼어놓겠다고 누가 그러는데? 그런 놈한테는 밀로의 최후를 맞게 해주겠어!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안 돼, 엘렌, 누가 뭐라 해도 안 돼! 린턴 가문 사람들이 지상에서 몽땅 녹아 없어지든 말든, 나는 히스클리프랑 헤어질 수 없어. 그렇게는 못해! 그렇게는 안해! 히스클리프랑 헤어져야 한다면 나는 린턴 부인 안 할 거야! 그 애는, 지금까지 내게 소중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에드거가 그 애를 싫어하지 못하게 할 거야. 싫어도 받아들이게 할 거야. 내가 그 애를 얼마나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면, 에드거도 그 애를 받아들일 거야. 넬리, 나도 알아, 너는 지금 나를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너 이런 생각 안 해봤어? 나랑 히스클리프랑 결혼하면 둘 다 거지꼴이 되겠지만, 내가 린턴이랑 결혼하면 히스클리프가 잘되도록 도와줄 수 있고, 오빠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게 해줄 수도 있어."
"아가씨 남편 돈으로요?" 내가 말했습니다. "아가씨 남편은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을걸요. 내가 가타부타할 문제는 아니지만, 린턴 청년과 결혼해야 하는 이유 중에 이번 것이 최악인 것 같네요."
"아니야." 캐서린이 응수했습니다. "이번 것이 최상이야. 다른 이유들은 내 기분을 위한 것이었고, 에드거도 그걸 바라니까 에드거를 위한 것이기도 했어. 하지만 이번 것은 그 애를 위한 거야. 에드거와 나 자신에 대한 나의 모든 감정들을 한데 모아 갖고 있는 그 애를 위한 거야. 내가 잘 표현을 못해서 그런데, 넬리 너도 그렇잖아…… 다들 그렇잖아…… 자기를 넘어서는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고,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내가 그냥 이런 몸뚱이일 뿐이라면, 내가 있는 게 무슨 소용이야? 내가 이 세상에서 겪은 가장 큰 고통은 히스클리프가 겪은 고통이야. 나는 그걸 처음부터 지켜보았고 그대로 느꼈어. 내 삶에서는 가장 큰 슬픔이 그 애였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 거야.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느낌이 없을 거야. 린턴에 대한 내 사랑은 숲 속의 잎사귀들 같아. 겨울이 나무의 모습을 바꾸듯 시간이 내 사랑을 변하게 하리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하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땅속에 파묻힌 변치 않는 바윗돌 같아. 넬리, 내가 곧 히스클리프인 거야. 그 애는 내 마음속에 항상, 항상 있는 거야. 기쁨을 주려고 있는게 아니야. 내가 나 자신에게 항상 기쁨을 주지는 않잖아. 그 애는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진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하면 안돼.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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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죽으면 저 여자가 상속자인가?" 히스클리프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묻더군요.
"그건 좀 서운한 일이지." 캐서린이 대꾸했습니다. "남자 조카들이 줄줄이 태어나서 고모의 상속권이 없어지게 하옵소서! 너도 이제 그런 생각일랑 당장 머리에서 지워버려. 너는 이웃집 재산을 너무 탐하는 경향이 있어. 이번에는 이웃집 재산이 내 재산이라는 걸 잊지 마."
"그게 내 재산이었다 해도, 네 재산이 됐을 거야." 히스클리프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사벨라 린턴이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설마 미치지는 않았겠지. 그러니까 네 말대로, 이런 얘기는 그만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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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없는 밤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안개 같은 어둠에 덮여 있었어요.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불빛 하나 새어 나오는 집이 없었습니다. 불이 전부 꺼진 지가 오래였습니다. 여기서는 폭풍의 언덕의 불빛이 보일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캐서린은 보인다고 했습니다.
"저기!" 캐서린이 열성적으로 소리쳤습니다. "내 방 촛불이야…… 창문 앞에 나무들이 흔들리고…… 저건 조지프 다락방의 촛불…… 조지프가 아직 깨어 있네?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야. 그래야 대문을 잠글 수 있으니. 하지만 한참 기다려야겠네. 험한 길인 데다 슬픈 마음으로 가고 있으니까. 우리는 기머턴 교회를 지나야 그곳으로 갈 수 있어! 같이 있으니까 유령들도 겁나지 않았어. 우리는 서로의 용기를 시험하면서 무덤 위에 올라보라고 하고 유령을 불러내보라고 했어…… 그런데, 히스클리프, 지금 다시 해보라고 하면, 할 수 있어? 네가 무덤 위로 올라오면 내가 놓아주지 않을 거야. 나는 혼자 누워 있지 않을 거야. 나를 깊은 땅속에 파묻고 나의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워도, 나는 네가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할 거야…… 자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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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안 돼요. 약속할 수 없어요. 히스클리프 씨와 나리가 다시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캐서린을 죽이는 거예요!"
"네가 도와줘야 그런 일이 안 생기지." 히스클리프가 말을 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그자로 인해 캐서린의 병이 조금이라도 악화된다면, 나로서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네가 이번에는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때, 캐서린이 에드거를 잃으면 많이 괴로울까? 캐서린이 괴로울까 봐 내가 참는 거야. 이제 너도 그자의 감정과 내 감정이 어떻게 다른지 알겠지. 그자가 내 입장이고 내가 그자의 입장이라면, 그자를 증오하는 마음이 내 인생을 쓰디쓴 원한 그 자체로 만든다고 해도, 나는 그자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안 믿어도 좋아! 내가 그자의 입장이라면, 캐서린이 그자를 보고 싶어 하는 한, 그자가 캐서린을 보러 오는 것을 막지 않아. 물론 캐서린이 그자가 염려하지 않게 되는 때가 오면, 나는 즉시 그자의 심장을 파내고 그자의 피를 마시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나는-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나라는 인간을 몰라서 그런 거야-캐서린이 그자를 염려하지 않게 되는 때가 올 때까지 내 목숨이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자의 머리카락 한오라기 안 건드려!"
"아무리 그래도," 제가 말을 막았습니다. "지금 히스클리프 씨는 캐서린이 완쾌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아무 거리낌 없이 송두리째 망쳐놓고 있잖아요. 캐서린은 히스클리프 씨를 거의 잊었는데, 굳이 기억 속에 비집고 들어가 또다시 갈등과 고통 속에 몰아넣으려고 하잖아요."
"그 애가 나를 거의 잊었다고?" 히스클리프 씨가 말했습니다. "이봐, 넬리! 그게 아니잖아! 알면서 왜 그래! 린턴 생각을 한 번 할 때 내 생각을 천 번 하는 애라는 걸 너도 나만큼 잘 알잖아! 내 인생에서 가장 비참했던 시절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작년 여름 이곳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지.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끔찍한 생각은 두 번 다시 안 해. 그 애가 자기 입으로 나를 잊었다고 하기 전까지는 안 해. 그 애가 정말로 나를 잊는다면, 린턴도 허깨비, 힌들리도 허깨비, 내가 꿈꾼 모든 것이 허깨비야. 그 애가 정말로 나를 잊는다면, 내 앞날은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로 끝나. 그 애 없는 삶은 지옥이야.
그 애가 에드거 린턴의 사랑을 나의 사랑보다 중히 여긴다고 생각했다니, 잠깐이지만 내가 바보였어. 그렇게 하찮은 인간이 혼신의 노력을 다 해서 여든 해를 사랑한다 해도, 내가 하루 사랑하는 것만 못하거든. 그리고 캐서린의 가슴속은 나의 가슴속만큼 깊은데, 그자가 그애의 사랑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건 여물통이 바다를 담겠다는 것과 다름없지. 쳇! 그 애가 그자를 아끼는 정도는 자기 개나 자기 말을 아끼는 정도에 불과해. 나만큼 사랑할 만한 것이 그자에게는 없는데, 그 애가 어떻게 사랑할 게 없는 자를 사랑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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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은 긴장한 빛으로 방문 쪽을 뚫어져라 보더군요. 히스클리프가 방을 단번에 찾지 못했기 때문에, 캐서린은 제게 그를 안내하라고 손짓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방문으로 가는 중에 그가 방을 찾아냈고, 한두 걸음 만에 캐서린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습니다.
히스클리프는 5분이 되도록 입을 열지도 않았고 팔을 풀지도 않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때 했던 입맞춤이 평생 그가 했던 입맞춤보다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입맞춤을 시작한 것은 캐서린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가 오로지 괴로움 때문에 부인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을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부인을 보는 순간, 그도 저처럼 부인이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것, 명이 다했다는 것, 죽을 날이 머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아아, 캐시! 너는 나의 목숨인데!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히스클리프 씨의 첫마디였습니다. 굳이 절망감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 말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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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까지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이 어느 틈에 다가섰는지는 모르지만, 캐서린이 몸을 내던지고 히스클리프가 받아 안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어요. 캐서린이 살아서는 풀려나지 못할 것만 같은 포옹이었지요. 사실 제 눈에는 캐서린이 곧바로 정신을 잃은 것 같았어요. 히스클리프는 마침 옆에 있던 의자로 몸을 던졌지만 제가 급히 다가가서 캐서린이 기절했는지 확인해보려 했더니,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미친개처럼 이를 드러내고 거품을 물면서 그녀를 끌어당겼습니다. 저게 무슨 인간인가 싶더군요. 저런 인간과는 말이 통할 것 같지가 않아서 저는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러고는 몹시 당황한 채 입을 다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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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의식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 네가 나간 다음부터 아무도 못 알아봤어." 제가 대답했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표정으로 누워 있었어. 마지막 순간에 그 애의 생각은 행복한 어린 시절로 돌아갔어. 정다운 꿈을 꾸면서 세상을 떠났어. 그 아이 영혼도 그렇게 정다운 곳으로 가게 해주소서!"
"괴로운 곳으로 가게 해주소서!" 히스클리프가 무섭도록 격렬하게 소리쳤습니다. 발을 쾅쾅 구르기도 하고 신음을 하기도 했어요. 제어할 수 없는 분노가 갑자기 폭발했던 것입니다. "아하, 끝까지 거짓말이야! 그 애가 있는 곳이 어디라고? 거기는 아니야, 천국은 아니야, 떠나지 않았어, 어디 있는 거야? 아아! 너는 내가 괴로운 건 상관 안 한다고 했지! 내가 기도하마, 혓바닥이 뻣뻣하게 굳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마, 내가 살아 있는 한 캐서린 언쇼를 고이 잠들지 못하게 하소서! 너는 내가 너를 죽였다고 했지, 그럼 나타나봐! 살해당한 사람은 자기를 살해한 사람 앞에 반드시 나타나니까. 지금도 이승을 떠도는 유령들이 있다고 하니까. 나를 떠나지 마, 유령이든 뭐든 상관없어, 나를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도 좋아! 떠나지만 않는다면! 네가 없는 이 나락에 나를 버려두고 떠나지만 않는다면! 이런, 제길! 그건 안 돼! 내 목숨이 없는데,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내 영혼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
히스클리프는 울퉁불퉁한 나무줄기에 머리통을 찧었습니다.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울부짖더군요. 인간이 아니라, 칼과 창에 찔려 죽게 생긴 야수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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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턴 부인의 장례식은 사망 후 첫번째 금요일로 정해졌습니다. 관은 장례식 날까지 뚜껑을 열고 꽃잎과 향기 나는 나뭇잎을 뿌려 큰 거실에 안치했습니다. 린턴은 낮이나 밤이나 잠 한숨 안 자고 관 옆을 지켰고, 히스클리프도 똑같이 밤마다 밖에서 불침번을 섰습니다. 히스클리프 쪽은 저만 아는 일이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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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리에게는 이승의 위안과 사랑도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처음 며칠간 나리는 죽은 캐서린을 이을 핏덩이가 안중에도 없는 듯했지만, 그런 냉담함은 4월의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지요. 어린것은 옹알이도 하기 전에, 걸음마도 떼기 전에 이미 나리의 가슴에 독재자로 군림했답니다.
나리는 아이의 이름을 캐서린이라고 지었지만, 항상 줄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나리가 먼젓번 캐서린을 한 번도 줄인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던 것은 히스클리프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 딸은 항상 캐시였고, 나리에게 딸은 아내와는 다른 존재인 동시에 아내와 연결되는 존재였습니다. 나리가 딸을 사랑한 것은 자기 딸이어서라기보다 아내와 연결된 존재라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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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이 없는 동안 저는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하녀장 자리를 포기하겠으니 저를 질라 대신 폭풍의 언덕에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제 입을 다물게 하더니 그제야 방 안을 둘러보고는 그림에 시선을 고정하더군요. 그는 린턴 부인의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말했습니다.
"저건 내가 집에 가져가야겠어.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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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 씨, 그런 나쁜 짓을!" 제가 소리쳤습니다. "고인의 안식을 어지럽히다니 부끄럽지 않던가요?"
"넬리, 내가 누굴 어지럽힌 게 아니야." 그가 대꾸했습니다. "나 자신한테 약간의 안정을 주었을 뿐이야. 이제 내 마음도 훨씬 편해질 테니, 내가 죽은 뒤에 얌전하게 묻혀 있을 가능성도 높아진 거야. 그 애의 안식을 어지럽혔다고? 천만에! 그 애야말로 나를 어지럽혔는걸. 밤이고 낮이고, 18년 내내, 끊임없이, 인정사정없이. 바로 어제까지도 말이야. 그런데 이제 다 끝난 거야. 어젯밤에는 마음이 편했어. 꿈을 꿨어. 잠든 그 애 옆에 누워 최후의 잠을 자는 꿈이었지. 내 심장은 멎어 있었고, 얼어붙은 내 뺨은 그 애의 뺨과 맞닿아 있었어."
"하지만 만약에 캐시가 흙이 되어버렸다면, 아니 흙보다 끔찍한 모습이었다면, 그랬으면 무슨 꿈을 꾸었을까?" 제가 말했습니다.
"그 애하고 같이 흙이 되는 꿈을 꿨겠지. 더 행복한 꿈." 그가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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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묻히던 날은 눈이 왔어. 나는 저녁에 묘지르 갔지. 겨울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어. 바보 같은 그 애 남편이 그렇게 늦은 시각에 거기까지 올 것 같지는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거기까지 올 일도 없었지.
그렇게 혼자서, 그 애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2미터 정도의 흙뿐임을 의식하면서 나는 혼잣말을 했어.
'그 애를 다시 품에 안을 거야! 그 애 몸이 차가우면 내 몸을 식히는 이 북풍 때문이고, 그 애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자고 있어서라고 생각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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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가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보는 사이 어둠이 찾아오고, 어둠과 함께 주인도 돌아왔습니다. 앞문으로 갑자기 들이닥친 탓에 우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기도 전에 그가 우리 셋을 보고 말았지요.
봐라. 이보다 더 보기 좋고 이보다 더 악의 없는 광경은 없다. 두 아이를 야단치는 일은 정말 부끄러운 짓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벽난로 불빛이 두 아이의 귀여운 머리를 비추니 왕성한 호기심으로 생기 넘치는 어린애 같은 표정이 드러났습니다. 헤어턴은 스물셋, 캐서린은 열여덟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새로 느껴야 할 것과 새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환멸을 경험한 사람의 냉정함이나 원숙함 같은 건 드러나지 않았어요.
두 아이는 동시에 고개를 들고 히스클리프 씨를 보았습니다. 록우드 씨는 눈여겨본 적이 없겠지만 두 아이는 눈이 아주 닮았답니다. 캐서린 언쇼의 눈이지요. 딸 캐서린은 눈 말고는 어머니를 닮은 데가 거의 없어요. 이마가 넓다는 것, 콧대의 높이 때문에 본심과는 상관없이 다소 도도해 보인다는 것 정도가 어머니를 닮았을까. 그런데 헤어턴은 캐서린 언쇼를 훨씬 많이 닮았어요. 언제 봐도 놀라울 정도랍니다. 그때 보니 정말 닮았더라고요. 평소와는 다른 활동으로 감각이 살아나고 지성이 깨어나서였겠지요.
히스클리프 씨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도 캐서린과 닮은 헤어턴의 얼굴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는 흥분해서 벽난로 앞으로 갔지만 헤어턴을 보는 동안 동요가 가라앉더군요. 아니, 계속 동요하고 있었지만 그 성격이 바뀌었다고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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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로, 저놈은 섬뜩할 정도로 캐서린을 닮아서 무서울 만큼 캐서린을 떠오르게 해. 그 점이 내 상상력에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게 가장 사소한 부분이야. 내게 캐서린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뭐가 있고, 캐서린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겠어? 이 바닥만 내려다봐도 깔린 돌들이 모두 그 애 모습인데! 구름들이, 나무들이 모두 그 애 모습인데! 밤이면 사방을 그 애가 가득 채우고, 낮이면 그 애의 모습이 나를 둘러싸서 모든 것이 그 애로 보여! 더없이 평범한 얼굴들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심지어 내 얼굴까지 그 애 얼굴처럼 보이면서 나를 조롱해! 온 세상이 그 애가 한때 살아 있었지만 이제 내 곁을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는 끔찍한 비망록이야!
내가 헤어턴을 보았을 때, 그 모습은 내 불멸의 사랑의 유령이었어. 내 권리를 지키려던 안간힘의 유령, 내 영락의 유령, 내 오만의 유령, 내 행복의 유령, 내 고뇌의 유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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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 씨의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신음 같은 깊은 숨소리가 수시로 적막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띄엄띄엄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는데, 제가 유일하게 알아들은 말은 캐서린이라는 이름 뒤에 붙은 열렬한 사모의 말 또는 번민의 말이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듯한 나직한 그 말에는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짜낸 진심이 어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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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문장


습지 옆 비탈에서 비석 세 개를 찾아보았다. 금방 눈에 띄었다. 가운데 것은 회색이었고 히스에 반쯤 묻혀 있었다. 에드거 린턴의 비석은 잔디와 어우러졌고 이끼가 비석 밑동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히스클리프의 것은 아직 벌거벗은 채였다.
나는 그 온화한 하늘 아래에서 비석 주변을 거닐기도 하고, 히스와 실잔대 사이를 파닥파닥 나는 나방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풀잎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 고요한 땅속에 고이 잠든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 그들이 잠을 설친다고 상상할 수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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